1997년 문화일보에 ‘신생의 폭설’이란 제목으로 1년여간 연재했다. 1999년 이를 다듬어 ‘침묵의 집’을 냈다. 2006년 돌연 분량(원고지 2600장)의 반을 쳐내고 ‘주름’으로 제목을 바꿨다. 9년이 흐른 최근에는 또 다시 300장을 줄였다. 벌써 3차례의 개작. 소설가 박범신(69)이 한 작품을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한번 책을 내면 다시 돌아보지 않는 내 습성과 달리, 이 이야기는 결코 두고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온한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왜 박범신은 유독 이 소설에 집착하는 것일까.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고향인 충남 논산의 작업실에서 막 올라오던 길이었다.
그는 “다시 펜을 든 후 발표한 5∼6편의 장편이 모두 ‘주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쉽게 보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93년 “상상력의 불이 꺼졌다”며 절필을 선언한 그가 5년 만에 낸 첫 장편이 ‘신생의 폭설’이었다. 이후 ‘고산자’ ‘촐라체’ ‘은교’ 등 갈망 3부작을 비롯해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등 삶의 유한성을 다룬 작품을 잇달아 출간했다. 그는 “절필 후 15년간 붙들었던 주제”라며 “‘주름’은 그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텍스트였다”고 했다.
박범신은 ‘주름’을 “은유 속에 피하거나 숨지 않고, 죽음을 정면으로 맞선 남녀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소설은 50대 남성의 파멸과 또 다른 생성을 그렸다. 50대 중반의 주류회사 자금담당 이사 김진영은 자신보다 연상인 시인이자 화가 천예린에게 빠져든다. 그녀가 외국으로 홀연히 떠나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 나선다. 천예린을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을 거쳐 북극해에 이르는 고행 속에서 김진영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바이칼호 인근에서 둘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왜 삶의 유한성에 천착했나.
“절필은 작가로서의 사망선고였기에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일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지 않나. 그런데 사랑은 살고자 하는 욕망을 만든다. 한 숙주에 맞물려 있는 죽음과 사랑(삶)의 욕망, 그 끝까지 끌어가 보고 싶었다.”
―고친 부분은.
“원래 소설 내용에 젊은 세대의 사랑이 반쯤 됐다. 이게 군더더기로 여겨져 모두 털어냈다. 50대 두 남녀로도 청춘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봤다. 에로티시즘적인 묘사도 많이 줄였다.”
―그럼에도 야한 부분이 많다.
“빈도나 부피는 줄였지만, 강도와 문장의 응집도를 높였다. 죽음의 턱 밑에서 저항하는 격렬한 몸짓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섹스의 모습으로는 이를 표현할 수 없었다. 천박한 포르노그래피나 단순한 중년의 사랑 이야기로 읽힐까 두렵다.”
―삶의 유한성에 대한 저항이 결국 일탈인가.
“순간적 바람이라면 일탈이겠지만, 이건 파멸에 정면으로 응수하는 치열한 사랑 이야기다. 사회적 명령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반역이랄까.”
―노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많이 쓴다.
“내가 늙었으니까. 이제 나이가 70이다. 최근 문학동네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소설 ‘꽃잎보다 붉던’도 치매에 걸린 노인의 사랑을 그린다. 하지만 감각은 젊다. 나는 ‘청년작가’다.”
박범신은 이 부분에서 “사회적 존재인 나는 이제 인생의 정리기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는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젊었을 때 가졌던 세상의 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손보고 있다고 했다. ‘주름’의 개작이 신호탄인 셈이다. 다른 장편들의 판권도 거둬들여 이미 수정 작업 중이고 초기 발표했던 단편을 고쳐 올가을에 7권의 단편 전집을 낼 계획이다. “발표한 작품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것, 독자들 것이란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최종본에 대한 욕망이 있다. ‘주름’도 또 고칠지 모른다.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길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에 대한 욕구도 여전하다. 그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점점 예민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앞선 것을 어떤 형식으로든 극복하는 작품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쓰려고 한다. 늙어 힘이 빠져서 젊을 때 쓴 것을 못 이기는 지리멸렬한 책을 낼 마음은 없다. 동어 반복이 되거나 상상력의 에너지가 떨어진다면 어느 지점에서는 다시 절필을 해야겠지.”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