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주변에 작고 깊은 벙커들이 널려 있어 ‘악마의 엉덩이’로 불리는 파인밸리골프클럽 10번 홀 벙커에서 한 골퍼가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벙커에 들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파인밸리골프클럽 홈페이지
美 뉴저지주 파인밸리골프클럽
미국 뉴저지 남부에 자리한 파인밸리골프클럽은 지난 2013년 개장 100주년을 맞이한 세계 최고의 골프장이다. 철저하게 회원 중심제로 운영되기에 파인밸리에서의 비회원 라운드는 하늘의 별따기다. 회원 한 명이 1년 동안 동반할 수 있는 비회원은 고작 21명에 불과하다.
지난 2002년 제주 나인브릿지에서 펼쳐진 월드클럽챔피언십에 참가했던 데이비드 브룩슨이라는 회원과 동반 라운드를 약속했다. 2004년 필자는 브룩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필라델피아에서 차로 30분 정도를 달려 뉴저지 클리멘튼의 파인밸리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전 세계 골프장 중 부동의 ‘넘버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인밸리 골프클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명성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가 주어지니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1913년 조지 크럼프라는 사업가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건설했고 1918년 정식으로 개장한 파인밸리. 일행과 더불어 둘러본 코스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골프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페어웨이가 제대로 붙어 있는 홀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파인밸리는 ‘세계 최대의 벙커’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간혹 바위와 잡풀이 무성한 웨이스트 벙커와 모래 페어웨이를 지나려면 코스 공략을 별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파5인 567야드 7번 홀은 ‘지옥의 하프 에이커’라고 불린다.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페어웨이라고 해봐야 중간이 뭉텅 잘려나간 잔디 흔적만 살짝 보인다. 게다가 그린 주변은 온통 벙커다. 10번 홀 그린 앞에는 ‘악마의 엉덩이(Devil’s Ass)’가 있다. 뾰족하고 깊게 파여 볼이 이곳에 빠지면 골퍼마저 그 속에 잠겨버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따라서 골퍼들의 실력 차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웬만한 골퍼들은 처참한 스코어를 받아들기 일쑤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서의 플레이가 ‘삶의 여정’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워도 언젠가는 좋은 때가 오리라는 것. 그래서일까? 코스의 주제는 ‘고독’이다. 최근 톰 파지오가 리노베이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세계 최고인 이곳의 코스는 파70(6999야드)으로 조성돼 있다. 골프장이라면 무조건 파72만을 떠올리는 우리네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카트 도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만들어진 카트길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여름에는 더없이 선선하다.
많이 부러웠지만 이는 한국의 지형 여건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티 박스에서 보이던 벙커가 그린에서는 감쪽같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푸른 자연만 눈에 들어오는 설계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야디지 마크나 거리표지목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리를 알 수 있을까? 곳곳에 자리한 스프링클러에 번호가 매겨져 있고, 이것으로 캐디가 소지한 야디지북을 통해 거리를 확인할 수 있다. 골프는 자연과의 싸움이므로 골퍼 스스로 판단하고 홀을 공략해야 하고, 이를 위해 너무 자세한 거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100대 코스의 선정기준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자연 친화성’이다. 아울러 훌륭한 홀이 얼마나 많고, 진부한 홀이 몇 개인지까지 따진다. 파인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자연 친화적이며 진부한 홀이 단 한 곳도 없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코스다. 앞서 말한 자연 러프 덕에 관리비용도 엄청나게 절감된다. 어떻게 100여 년 전에 지금과 같은 자연 친화성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혜안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변에 깔린 조약돌이 인상적인 L자 모양의 클럽하우스는 맵시나 우아함은 없지만 따스한 환영의 손길을 내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오는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숙박시설도 갖추고 있다. 그늘집에는 비회원들이 소지한 볼을 기념으로 하나씩 넣을 수 있는 함이 마련돼 있어 세계 각국의 볼 전시회장을 방불케 한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뜬눈으로 지새운 밤 등 고단했던 여정은 파인밸리가 안겨준 보상으로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