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준 / 논설위원

“지난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승 70주년 행사를 지켜봤는데, 러시아 국기는 보이질 않고, 오렌지색과 검은색으로 된 깃발만 가득하던데, 왜 그런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것은 깃발이 아니라 ‘성 조지 리본’이었다. 오렌지색 바탕에 검은색 3줄이 그려진 휘장으로 러시아 황실 군대의 상징이다. 1769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최고 무공훈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사라졌다가, 1942년 스탈린이 엘리트 근위대에 부여하면서 부활했다. 검은색은 화약, 오렌지색은 불을 의미한다. 성 조지는 백마를 타고 사악한 용을 물리쳤다는 전설 속의 기사(騎士)로서, 모스크바 수호성인이다.

최근 러시아는 국기인 백·청·적 삼색기가 아닌 성 조지 리본으로 뒤덮여 있다. 보드카 병과 어린이 막대 사탕마저도 이 리본으로 감싸져 있다. 그러나 발트3국이나 조지아는 성 조지 리본을 러시아 팽창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고 치를 떤다. 특히 2014년 3월 크림반도 합병 뒤, 우크라이나 동부 분리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자, 우크라이나인들은 오렌지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지닌 해충인 콜로라도감자잎벌레에 빗대 ‘콜로라도 리본’이라 부른다.

1990년대 초반 필자가 러시아에 있을 때, 하숙하던 집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소련군 퇴역 대령으로 틈만 나면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공방전’ 무용담을 들려주곤 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더니 펑펑 울면서 “우리가 이긴 게 맞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날 미국으로 망명했던 군 동기가 귀국해서 한턱냈다고 한다. 선물로 미제 스팸도 가져왔다. 약 50년 만에 맛보는 그 맛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미국 지원 식량을 먹고 싸웠다고 한다. 그 후 할아버지는 보드카로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는 현 러시아 경제 위기는 서방의 봉쇄 탓이며, 대(大)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러시아 파괴 세력에 맞서 싸우자고 독려하고 있다. 이를 위한 상징이 성 조지 리본이다. 지난 20세기 나치 침공과 스탈린 공산독재라는 세계사적 고통을 온몸에 짊어지고 살아온 러시아인들은 언제나 진정한 승리자가 될까. “나치독일은 패배했으나 독일인은 해방되고, 소련군은 승리했으나 러시아인은 노예로 남게 된 날”이란 어느 러시아 재야인사의 평은 너무 가혹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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