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더 치러야 할 선거가 없다”(I have no more campaigns to run)는 것이다. 표에 대한 중압감에서 드디어 해방됐음을 뜻하는 것인데 더 이상 표를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할 때 애용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새해 국정연설 때 이 말을 한 뒤 “앞으로 남은 2년간 미국을 위해 최선이라고 믿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들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민주당 내 반대가 거세지자 “나는 더 이상 표를 얻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며 “TPP는 미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여론 설득에 나서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 내 진보파를 대변하는 엘리자베스 워런(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반 TPP 선봉에 서자 “그와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 공감하지만, TPP 문제에서만큼은 워런 의원이 완전히 틀렸다”고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초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민주당의 유일 대선주자로 꼽히자 “워런도 있다”며 견제구를 날릴 정도로 워런 상원의원을 정치적 동지로 여겨왔다. 그런 그가 워런 상원의원을 과감하게 공격한 것은 TPP를 표가 아닌, 국가 미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정치인 시절’엔 워런 상원의원 같은 주장을 했다.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노조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이던 지난 2008년 말 한·미 FTA에 대해 “불공평한 협정”이라고 비판했다. 이명박정부는 출범 초 한·미 FTA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비우호적 태도 때문에 애를 먹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 FTA 지지자로 돌아선 것은 백악관 입성 후 첫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다. 2011년 한·미FTA비준안이 양국 의회에서 통과했을 때 “21세기 자유무역협정의 모델”이라고까지 극찬했다. 물론 은근슬쩍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니다. 한·미 FTA 미 의회 비준을 앞두고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 협상을 중단하려 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며 과거 생각이 틀렸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상원의원 시절 한·미 FTA를 반대했던 그는 백악관 입성 후 점차 찬성 쪽으로 선회했고 이제 일본 등 12개국과의 TPP 강력 옹호자가 됐다. 오바마의 그런 변심 과정은 노조 등 소수 이익집단의 표에 발 묶인 정치인이 선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국가 지도자로 나아가는 전환의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선 과장된 주장을 어느 정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국가의 현실 앞에 설 때엔 해야 할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가려 국민 앞에 정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더 이상 치러야 할 선거가 없는 만큼, 표를 의식해 제시했던 과도한 경제민주화공약 등에 대해 현실적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게 지도자의 길이다. 오바마가 보여준 유쾌한 변심 과정을 한국에서도 보고 싶다.
muse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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