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를 도입한 지 1년 반 가까이 지났다. 그러나 새 주소는 아직도 일상에 정착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워낙 오랫동안 지번(地番) 주소에 익숙해진 탓이라지만 앞으로도 개선의 소지가 커 보이지 않는다.
먼저, 도로명 주소는 우리의 공간 지각(空間知覺) 양식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도로명 주소가 서구 선진국에서 그 유용성이 검증됐다고 하지만, 서구와 우리는 공간 지각 양식이 서로 다르다. 비유하자면 서구인은 주로 개별 나무에 주목한 후 점차 숲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반면에 우리는 숲을 먼저 살핀 이후에 개별 나무로 인식의 초점을 이동한다. 우리가 사물 간의 관계나 배경에 주목한다면, 서구인은 개별 존재 자체에 치중하는 까닭이다. 카메라로 치면 우리가 상위 공간에서 하위 공간으로 이동하는 줌인(zoom-in) 전략을 통해 피사체에 접근한다면, 서구인은 그 반대인 줌아웃(zoom-out) 전략에 익숙하다.
도로상의 건물을 특정해 길 찾기에 나서는 도로명 주소는 바로 이 줌아웃 전략에 기초한다. 그래서 서구의 도로명 주소는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공간을 향해 순차적으로 정리돼 있다. 지번·도로명·도시명·국명 순서다. 그러나 우리의 도로명 주소는 역순으로 돼 있다. 줌아웃을 지향하는 도로명 주소에 줌인 전략을 도입한 것이다. 이런 자기 충돌적인 공간 지각 양식으로는 주소지 특정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줌아웃 전략을 취했더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의 공간 지각 양식과 상합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현행 도로명은 공간 지각 수요를 염두에 두고 구성돼 있지 않다. 도로의 길이에 따라 ‘○○대로’ ‘○○로’ ‘○○길’로 나누었을 뿐이다. 이름 없는 도로가 많았던 탓에 대부분 새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도로의 공간적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서구에서는 도로명을 A로, B로, C로나 1길, 2길, 3길로 명명해 도로의 순차성을 통해 그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하도록 돕기도 한다. 대체로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은 애비뉴(avenue), 동서로 난 길은 스트리트(street)로 명명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편, 지번 주소가 농업사회의 산물이라면 도로명 주소는 산업사회의 소산이다. 지번 주소는 자연 취락 생성과 궤를 같이한다. 반면에 도로명 주소는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안됐다. 지번 주소가 점(點) 중심이라면, 도로명 주소는 선(線) 중심인 이유다. 점 중심의 주소는 1차원적인 만큼 주변과의 체계적인 연계가 없어 도시화율이 90% 이상인 우리의 경우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반면에 선 중심의 주소는 2차원적인 만큼 선형 체계(線型體系)를 함축한다. 어떤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예정성, 점증성, 측정 가능성을 키운다. 따라서 계획도시에서의 유용성이 매우 크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대다수 도시가 산을 끼고 발달해 선형 체계의 이런 유용성이 반감된다는 데 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미 정보사회에 들어섰다는 데 있다. 오늘날 길 찾는다고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하거나 웹사이트에 들어가 ‘길찾기’로 주소지를 특정한다. 선 따라 이동하는 2차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3차원 공간 지각 시대다. 요리를 순차적으로 내놓는 서양식 선형 체계가 아니라 한꺼번에 내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때그때 필요한 음식을 취하는 우리식 밥상 문화, 즉 총합적(holistic) 공간 포착 시대다. 이 경우 1차원적인 주소냐 2차원적인 주소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3차원적인 공간 지각 시대에는 어떤 주소건 그것을 가상공간에 띄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길찾기의 용이성이나 행정 관리상의 편의성을 좌우하는 결정 변수는 주소 체계의 구성원리가 아니라, 가상공간에 주소를 얼마나 신속하고 경제적이며 또 평등하게 입력하고 검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현행 도로명 주소는 너무 길다. 이용의 효율성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주소의 한계효용을 높이려면 주소 체계를 바꿀 게 아니라 주소의 활용법 개선에 주목했어야 했다.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대 성격 변화의 진단 없이 대뜸 거금을 들여 주소 체계를 교체한 정부 당국이 안타깝다. 새 주소를 이대로 계속 사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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