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의회 건물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의회 건물은 그 규모에 있어서도 백악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이것은 미국 의회가 근대 정치의 핵심인 ‘대의제(代議制)’의 본산이고 미국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막강한 의회 권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미국 대통령은 잦은 기자회견과 연설, 대국민 접촉을 통한 ‘설득권력’을 최대한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민족 사회 미국만큼 안보·복지·의료·교육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각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흔히 우리는 ‘갈등 없는 정치’를 얘기하지만 그런 정치는 독재 체제 아니면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다. 미국 사회의 갈등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가 안정됐다는 것은 대의제의 두 축인 대통령과 의회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사회적 갈등이 ‘대의제’의 중심을 이루는 의회를 통해 걸러지는 과정에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 정치인과 국민은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이 바로 ‘대의제’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2000년 전 아테네에서 시행된 직접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상 직접민주주의는 실현된 적이 없다. 아테네의 경우만 하더라도 여성과 노예를 제외한 자유인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대표를 뽑아서 국정을 운영했다. 국민투표가 아니라 추첨제라는 대표 선출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여전히 대표가 도시국가를 지배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대표에 의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대의제를 대체하면 직접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과 현재의 북한 체제가 보여주듯이 직접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 독재’로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대의제가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제헌헌법부터 1987년 헌법까지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치가 파행을 거듭하는 것은 대의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인 대의제를 대표하는 정치인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대표’라고 하면 대통령은 전 국민의 투표에 의해 뽑힌 ‘전국구 대표’이다.

현재 지역구 대표들이 모인 국회는 국회 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중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박근혜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공공·노동·교육·금융 분야의 4대 개혁 과제는 국회에서 관련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해 그 추진 동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됐음에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한국 대의정치의 현주소다. 개혁 입법이 지연되고 경제 활성화 관련 법안들이 처리되지 않아서 고통받는 것은 국민뿐이다. 이런 상황은 국민의 심각한 정치 불신을 낳고 ‘대의제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현재로선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새누리당만 하더라도 친박과 친이계 등으로 정치인들을 분류하지만, 이는 아무런 정치 비전이나 정책적 차이가 없는 계파 구분에 불과하다. 눈을 야당으로 돌려보면 친노와 비노, 동교동계라고 하지만 정책 차이가 없는 계파 집단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지다. 강한 야당이 있어야 여당도 긴장하면서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데 지리멸렬한 지금 야당의 모습은 국민을 크게 실망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의 위기를 타파하는 길은 미국처럼 국민의 ‘전국구 대표’인 박 대통령이 더욱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4대 개혁안의 내용과 그 필요성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설득권력’을 행사해 국민에게 설명하고 국회가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국회 선진화법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직접 그 개정의 필요성을 국민 앞에 나서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 대의제의 두 축인 대통령과 국회 모두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 한국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위기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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