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제노장임정도.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하일제노장임정도.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갑자기 웅성대며 그림 속 인물들이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복작거리는 18세기 중국의 도시 풍경을 그린 하일제노장임정도(夏日題老將林亭圖). 가로 45㎝에 높이는 1m.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쑤저우(蘇州)에서 제작된 대형 채색 판화입니다. ‘쑤저우 판화’는 전 세계에 10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려 불화처럼 완성도가 매우 높고, 또 희소한 예술품 중 하나지요. 서양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사용해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입니다. 이 귀한 그림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자리한 명주사(주지 선학) 고판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절에 웬 판화냐고요. “이젠 포교도 문화로 해야 한다”는 주지 스님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박물관은 조선 시대 오륜행실도를 찍은 목판 원판과 용비어천가 효종 본, 남송시대 아미타내영도목판 등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집한 고판화 원판과 인출 서적 등 4000여 점을 소장한 ‘알짜배기’ 사립 박물관입니다. 여기에, 고판화연구소까지. 점점 궁금해집니다. 이참에 떠나 볼까. 곧 야생화가 만발할 텐데. 금강소나무 숲길도 한번 맨발로 걸어 보고. 판화를 감상하던 마음은 이미 치악산을 오릅니다.

판화들을 만난 건 바로 지난 2일. 치악산이 아니라 서울 세종로 국립민속박물관 기획 전시실에서입니다. 3일 공식 개막해 7월 20일까지 이어지는 ‘인쇄문화의 꽃, 고판화’ 전.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알찬) 지역 공·사립 박물관의 소장품을 서울에서 소개하는 ‘K-뮤지엄 특별 초청전’의 첫 번째입니다. 한류 열풍 이후 생겨난 K-팝, K-푸드, K-뷰티. ‘K-’에는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한국적인 것이 세계로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요. 이는 국가 이미지 상승, 경제 효과로도 이어집니다.

민속박물관의 ‘K-뮤지엄’ 프로젝트는 남다릅니다. 기존의 ‘K-’보다 소박하지만, 내실 있는 꿈을 꿉니다. 아이돌 그룹이 남미에서 공연을 하고, ‘큰손’ 중국인이 명동 거리를 휩쓸고, 한국 디자이너의 옷이 해외 런웨이에 오르는 건 뿌듯한 일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문화가 있는 삶’을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K-뮤지엄은 밖이 아닌 안에서부터 문화를 누리라고 권합니다. 전국에 이렇게 ‘보물 창고’가 많다고. 또, K-팝이 해외 관광객을 불러들인 것처럼, 지역 내에서 K-팝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전시는 9월에 ‘제집’을 찾아갑니다. 민속박물관에서의 구성 그대로 명주사에서 순회전을 여는 것이지요. 지난해 ‘IDEA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할 만큼 민속박물관의 전시 디자인 역량은 매우 뛰어납니다. 순회전을 통해 고판화박물관의 전시 기법도 한 단계 도약할 테지요. 지역의 문화 향유 수준도 함께 높이며.

pdm@munhwa.com
박동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