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송재우 기자 jaew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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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소설가 권지예가 찾은 ‘이화여대 앞’

‘이대 앞’이란 단어는 단순히 이화여자대학교의 앞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코드였다. 지금은 상권을 홍대 앞으로 빼앗겼지만 한때 이대 앞은 유행의 중심지였다. 나도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이 거리에서 청춘을 보냈다. 지하철 2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로 난 도로에서 이대 정문까지 난 길,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길이 행정 도로명이다. 그리고 그 길의 좌우로 퍼져나간 골목들. 그곳은 당시 청량리 촌뜨기 소녀에겐 화려한 의상실과 수제화 가게, 다방과 제과점, 경양식집, 미장원이 즐비한 새로운 세계였다. 거리는 늘 북적였다. 그러나 이대 앞에 이대생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다. 중고생부터 직장인까지 그곳은 젊음의 메카 같은 곳이었다. 누구나 머리 하고, 옷 사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데이트 하고, 친구 만나러 이대 앞에 왔다. 여자들이 북적이는 곳엔 남자들이 꼬이는 법. 이대 앞은 이대생이 아니라도 누구나 한두 가지 추억을 간직한 곳이리라.

오랜만에 이대 앞을 가게 됐다. 5월 초에 모교에서 특강 초청을 했기 때문이다. 특강 장소인 강의실이 있는 ECC 건물은 몇 번 온 적이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이 건물 안에는 영화관 아트하우스 모모, 교보문고, 팬시점, 카페와 레스토랑, 옷 가게 등 다양한 문화공간이 있다. 거대한 중앙 계단 양쪽으로 모세의 기적처럼 쩍 갈라진 건물의 지붕 격인 양쪽 둔덕은 5월의 신록과 꽃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그곳을 나와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데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스마트폰을 들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이대에 중국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는 이화(梨花)의 중국어 발음(리화)이 ‘돈이 불어나다’는 뜻의 ‘리파(利發)’와 비슷하고 중국에서는 배꽃이 부(富)와 복(福)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30여 년 전에 이곳은 ‘금남의 장소’였다. 남자뿐 아니라 남녀노소, 특히 중국인들이 캠퍼스를 장악할 줄 어찌 꿈엔들 상상했을까. 나의 자전적 소설인 ‘아름다운 지옥’에 이런 묘사가 있다.

“간혹 교문 앞에 멀대 같이 서 있는 남자 애들을 볼 때 저 속에 혹시 하현섭이 끼어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보곤 했다. 공주를 배알하려는 흑기사처럼 귀공자풍의 남자 애들이 정문 앞이나 경양식 집 앞에서 여자애들을 기다리는 모습이 늘 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었는데, 그런 숭배자가 한둘쯤 있다면 기분이 나쁠 거까지야 없을 것 같았다.”

당시 금남의 구역인 캠퍼스로 들어오지 못한 남학생들은 정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5월 축제 무렵이면 ‘물 좋기’로 소문난 이대 앞에 남학생들이 ‘삐끼’같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저랑 같이 축제 가실래요?”

정문 쪽으로 있었던,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진 추억 속의 이화교(梨花橋) 역시 소설에도 나온다.

“대강당 계단을 내려오는데 기적소리가 뚜우, 하고 난다. 그러자 여자 애들이 우르르 정문으로 이어지는 다리 위로 뛰어 간다. 광장에서 정문으로 가는 길목엔 다리가 있고 그 밑은 철길이다. 신촌역으로 달리는 기차의 꼬리를 다리 위에서 밟으면 행운이 온다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여자 애들은 믿고 있다. 기차 꼬리 밟기. 혼자라면 속으로 웃고 말지만, 친구들과 함께 지날 때면 나도 몇 번 해본 짓이다. 여자 애들의 웃음소리가 멀리 퍼진다. 청춘은 아름다워, 정말. 특히 남들의 청춘은.”

당시 비싸고 화려한 의상실이 있던 곳은 지금은 화장품 매장으로 대부분 바뀌어 있다. 지금 재벌 그룹이 된 이랜드가 내가 학생이었을 때 ‘잉글랜드’라는 작은 보세집이었다는 것도 기억난다. 기성복 캐주얼 시대가 되면서 의상실이 점차 사라지고, 문전성시를 이루던 ‘빌리지’라는 이름의 옷과 액세서리 종합매장이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래도 90년대까지만 해도 이 거리는 패션가로 성황을 누렸다.

그 옛날 학창시절 단골이었던 빠리다방, 미뇽다방은 없어지고 커피빈, 스타벅스 등 테이크아웃 커피 체인점이 눈에 많이 띈다. 지금은 이런 카페가 흔해 빠졌지만, 1999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이런 커피전문점인 스타벅스 1호점이 생긴 곳도 이대 앞이었다. 예전에는 여대생들이 작은 핸드백을 메고 책 꾸러미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면, 언제부턴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캠퍼스를 누비는 풍경이 나온 것도 스타벅스의 출현 이후일 것이다.

모든 게 변한 거리에서도, 30여 년 세월 속에서도 남아있는 내 추억 속의 분식집 ‘가미’에 가서 예전처럼 매운 우동과 주먹밥을 시켜먹었다. ‘오리지날’ 튀김집 간판이 보여 반가웠지만 분위기는 옛날 오리지널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80년대만 해도 이대 앞 튀김과 떡볶이는 유명해서 ‘오리지날’ 분식집 주변으로는 성황을 이룬 ‘가리지날’ 분식집들이 많았다.

이대 앞 메인 거리 중앙에는 붉은색 지붕의 노점상이 도열해 있다. 음료나 음식, 액세서리·잡화 등을 취급하며 심지어는 사주도 봐주는 카페가 있다. 아이스크림이나 추로스 같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음식의 맛이 대체로 호평을 얻고 있다. 이대 앞에는 특이하게도 사주 카페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주로 타로 점과 사주 풀이를 하는데 가본 사람들은 그리 비싸지 않은 복채에 커피까지 마시고 점괘도 잘 맞는다고 한다.

이곳 토박이이며 1972년부터 ‘모네’라는 갤러리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잠깐 들렀다. 전쟁 후 1950년대부터 이곳에 살았던 그는 논밭이 있고 ‘하코방’이라 불렀던 판잣집이 즐비했던 어린 시절의 이대 앞을 이야기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이대 앞은 화려함의 극치였지만 뒷골목은 사실 달동네였다. 이대 전철역으로 향하는 오른쪽 편에 예스에이피엠이라는 대형 쇼핑몰과 웨딩홀 건물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당시에 어처구니없게도 이대 앞 거리의 화려한 상점가에서 몇 발짝만 뒷골목으로 걸어가면 허름하고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곳엔 가난한 지방출신 대학생이 작은 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도 했다. 당시 갓 사귀기 시작한 내 남자친구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게 지겨웠을까. 그가 이대 앞으로 이사했다기에 의아했는데, 시골 출신의 자취생이었던 그가 이사한 곳도 이대 앞 뒷골목의 달동네였다. 이렇듯 이대 앞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 동네였다.

한때 이대 앞 불패 신화도 이제는 사그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신촌역과 연세대를 잇는 서쪽과 이대 전철역과 연결된 아현동 쪽도 마찬가지다.

아현동에서 이대정문 쪽으로 오다 보면 쇼윈도의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들에 취해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신촌역으로 가는 길은 정육점의 조명을 받고 몸 파는 아가씨들이 자신을 쇼윈도에 진열하던 홍등가였다. 이제는 추억 속의 장면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이대 앞은 누구나 가슴 속에 지닌 한 권의 성장소설, 간혹 그 책의 페이지를 열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거리의 풍물들은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람들의 추억이 스민 곳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라도 이대 앞에 가면 아련하고 따스하다.

소설가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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