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처음 만난 오연천 울산대 총장은 기자를 기다렸다는 듯 비서실 앞까지 마중을 나와 살갑게 손을 잡고 총장실로 이끌었다. 환한 웃음이 피어나는 그의 얼굴에는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자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 총장직을 무사히 마치고, 왜 울산대라는 지역의 대학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찾아온 터였다. 울산대 총장 취임 100일을 갓 넘긴 그는 아직 언론사와 정식 인터뷰를 한 적이 없어 무척 망설였다면서도 막상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 나갔다.
―서울대 총장을 마치시고 지역에 있는 울산대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지역 대학에 소명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무엇인지요.
“울산대로 자리를 옮긴 초창기에 ‘축하한다’는 인사 대신 ‘어떻게 오시게 됐나’라는 호기심 반, 의구심 반의 물음을 많이 접했습니다. 하루에도 그런 질문을 3∼4번이나 받았죠. 그때마다 저는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저한테 또 다른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요. 또 울산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동안 제가 받은 혜택을 되돌려줄 기회가 생겼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서울에서 성장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 은연중에 상당한 혜택을 받은 구도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중앙, 지방, 경상, 충청을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요. 거기 가서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던 겁니다. 서울대-울산대라는 수직적 구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명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지방대학이라는 말도 잘못됐다고 봅니다. 지방대는 마치 중앙의 변방이라는 설정인데, 그냥 울산대이고 서울대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소위 공동체적 가치에 기여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드는데 일부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저를 폄하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수직적 구도로 놓거나 선입견을 두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서울대 총장 시절 총장실 점거 등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총장님은 소통의 아이콘답게 학생들과 소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학생들과 대화할 때 한계나 답답함은 없었습니까.
“(웃으면서)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봅니다. 100% 마음을 비웠죠. ‘총장직을 당장 안 해도 된다. 이 자리에 연연하면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어느 시점이라도 물러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갖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 때문에 ‘오연천 리더십이 저게 뭐냐’라는 의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누군가 권력(권한)을 갖고 있다면,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나 도전세력이 비논리적이고 억지를 부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목소리와 존재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점거 농성을 한 학생들을 사법처벌하자, 공권력을 동원하자는 등 반대의견도 있었을 텐데요.
“학생들이 법인화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법인화는 학생들에게 나쁜 점은 제로이고, 좋은 점은 플러스 알파인데요. 학생들의 정보도 제한적이었고, 편견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경청하고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인내심이 생기더라고요. 어떤 상황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는 항상 기본적으로 정치과정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정치과정에서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그룹이 존재하고, 그 목소리는 그들의 존재가치인 것입니다. 항상 인내심을 갖고 상대를 이해해야 나의 가치를 이해시킬 수 있는 접목 부분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면 반대주장을 조금씩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지요.”
―총장 되시고 얼마 만에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8개월 만에 생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직원들까지 기습점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루 만에 끝났고, 학생들은 한 달 만에 끝났지요. 이러한 경험을 하고 느낀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나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끝내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장님은 법관이 피고인의 주장을 들어주는 것처럼 무한히 경청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안을 가지고 왔을 때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안을 이루기 위해, 또 하나는 목적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이해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세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법인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목표를 뒀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옷을 벗더라도 ‘학생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절대가치라고 생각했지요. 놀라운 점은 처음에는 학생들이 우리를 기득권 세력으로 보더니, 2∼3주 지나서는 우리를 불쌍하게 보더군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물리력 동원도 없다 보니 서서히 인간적 측면에서 공감대를 갖더라고요.”
―이 에피소드 하나로 총장님의 리더십의 정수를 본 기분입니다.
“또 하나 이야기를 드리죠. 법인화(점거 농성) 때문에 총장실에도 못 가고 할 때 다들 나만 바라보고, 외부에서 전화도 많이 오고 했지만 저는 ‘신뢰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수호천사가 있다면,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요. 일반적으로 반대를 하는 세력들이 ‘소통 부족’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쪽에서 아무리 소통을 한다 해도 본인이 원하는 정보가 아니면 소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을 해야 합니다.”
―소통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서울대 총장 시절 첫 출근 날 용역회사 직원들과 식사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서울대 총장 되고 첫 출근을 하는 날 학교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지켜주시는 경비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누구와 먹을까, 가장 어려우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하고 생각하다 바로 비정규직 분들이라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래서 60∼70명 되는 분들한테 새로 왔다고 인사하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다음에 이분들이 모두 사진을 찍자고 하더군요. 저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다른 분들은 몰라도 이분들은 집에 가서 새 총장과 식사했다는 사실이 스토리텔링이 될 거라고 짐작하고 사진을 찍었지요. 식사시간이 계획보다 20∼30분 더 걸렸지만, 참 값진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주기라도 했나요.
“누가 그런 생각을 주었겠습니까? 당시 총무과장한테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크게 놀라더군요.”
―공무원 생활을 하다 학자로 돌아가셨는데,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총무처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다 미국 뉴욕대로 유학(석사 학위)을 갔었지요. 그때는 영어도 제대로 못 하고 해서 사실 많은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6·25 때 훈련 안 받고 전쟁터에 나간,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대학에 가서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일부러 교수님한테 질문했지요. ‘내가 한국에서 왔지만 이 수업을 알아듣고 있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강의 잘 들었다’고 꼭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또 편지를 써서 ‘그 시간에 어떠어떠한 메시지를 새로 받았는데 참 신기했다’고 했더니, 교수님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 인연 등으로 제가 6개월 있다가 통계학 강의조교로 선임이 됐어요. 강의를 하면서 등록금이 면제돼 좋았지요. 뉴욕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비싼 대학이거든요. 게다가 한 달에 300달러씩 주더라고요. 그래서 공무원을 그만두고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통계학 때문에 공무원 외에 다른 먹고 살 방법을 찾으셨다는 거네요.
“미국 학생들 중에서 수학이나 통계학에 너무 취약한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 학생들을 위한 예비 클래스가 있었어요. 제가 그 예비클래스에서 강의를 했는데, 가르치면서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지요. 그걸 제가 3년 동안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공부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내가 통계학 강의를 한다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믿지를 않더라고요. ‘너 수학 못 해서 문과에 갔는데 어떻게 통계학 갖고 밥 먹고 사느냐’면서요.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수학 실력만 있으면 통계학 전공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통계학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지요.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서구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직접 서구 문명을 보고 나니 거기에서 생활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2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공무원생활 복귀 6개월 만에 사표를 내버린 거죠.”
―유학시절 신문을 많이 보셨다면서요.
“저는 하루에 2시간씩 무조건 뉴욕타임스를 읽었습니다. 돈을 가장 적게 들이고서 지식을 확보하는 방법이 신문 읽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사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른 신문(일반 종합지)을 읽었습니다. 그다음에 고등학교 때는 학교 영자지 신문 편집장을 했었고요, 대학 때는 대학신문 기자를 했습니다. 유학시절에 박사논문을 쓸 때는 수입이 부족해서 뉴욕한국(한국일보 뉴욕판)에 1년 반 동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에 나오는 칼럼을 번역해서 송고하기도 했습니다.”
―신문의 가치를 높게 보시는군요.
“신문은 지혜의 샘이죠. 제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님의 어록을 많이 접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신문이 지혜의 보고(寶庫)인데, 왜 그걸 안 보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신문을 단순히 읽지 말고 신문을 읽고 그걸 지식화하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유학시절 4년 동안 뉴욕타임스 탐독자였는데, 아침에 9∼11시까지 국제기사를 열심히 봤습니다. 주말엔 ‘위크 앤 리뷰’를 봤는데, 그 자체가 공부였습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트렌드까지 모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지요. 저는 사실 그동안 고교, 대학, 유학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문을 읽어서 배운 게 정말 많았습니다.”
―울산대 총장으로서의 포부가 있을 텐데요.
“기본적으로 서울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학문 후속 세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학문 후속 세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 양성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울산대로서 가장 중요한 과업은 학부 교육을 통해 자기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현장형 직업인을 만드는 일이라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요. 따라서 울산대는 서울대와 같은 연구 중심 대학에 비해 학부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울산대가 학문 후속 세대를 양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현재 갖고 있는 자원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런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울산대만의 장점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제가 울산대의 초빙에 응한 배경 중 하나는 울산대만큼 좋은 여건을 가진 대학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울산대는 뭐니뭐니해도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선생께서 대학을 만들었다는 뿌리가 있습니다. 저는 정주영 선생이 우리나라 근대화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가공동체를 위한 대학의 역할이 소중하다’는 것, 또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산업발전과 경제발전으로 연결시켜야 우리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울산대의 2가지 창학이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울산대에서 저에게 총장 제안을 했을 때 가장 확신을 준 대목이 그 부분이기도 했지요. 현실적으로 울산대는 설립한 지 45년밖에 안 됐지만 바로 주변에 글로벌 기업이 존재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산업체와의 협력, 지역과의 협력이 가장 명실상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대학이라고 봅니다. 저는 울산에 와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대화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중공업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석유화학 회사, 중소기업, 울산시 등이 함께 어우러져 산·관·학 공동체라는 특이한 주권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정부와 대학과 산업이 삼위일체가 돼서 서로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고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데, 거기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제가 그것을 채우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울산시청 직원이 와도 무조건 만납니다. ‘시장님이나 간부가 아니면 만날 필요가 있느냐’ 하는데 저는 과장이든 사무관이든 만납니다. 그분도 우리의 고객이고 우리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좀 무거운 질문인데, 총장님 취임사를 보면 ‘지적 주체성으로 아시아의 가치와 한국의 가치를 찾아라’고 하신 대목이 있는데, 학문의 주체성을 회복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서구 학문에 맹목적으로 매몰되지 말고, 우리에 맞는 걸 개발해야 된다’는 소신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 의식화 소년이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족주의, 사회적 평등문제에 심취해 있었지요.”
―그러면 그때는 1960년대 초반이고 이제 막 군부가 집권해 많은 분야에서 미군에 의존할 때인데, 그때 종속성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때 친구들에게 이렇게 설파했었지요. ‘너희들 왜 이리 안일하냐. 지금 수학공식 외워서 뭐하냐’라고요. 그러다가 대학 가서 철이 들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몸하고 생각하는 머리밖에 없는데, 내가 역량을 키우고 살 방법을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죠. 정치학과에 와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내 스스로 국가의 통제대상이 될 수 있는 피동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번민하면서 제도권으로 들어갔습니다.”
―1970년 학번이었지만 당시 동아리는 없었을 텐데요.
“1970년대 초부터 지금의 운동권이 있었습니다. 그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제정구·이호웅 전 국회의원, 언론인인 김효순, 작고한 나병식 씨 등이 있습니다. 맹장들이 그때 나왔지요. 그런데 그때 어떻게 보면 양지로 이탈했습니다. ‘내가 생존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수 자생적 운동권에서 양지의 제도권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운동권 선배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1학년 때부터 공부를 계속했던 사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정통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데서 온 사람이 교수도 되고 하니,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치고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인식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신에 저는 공통의 이익,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 기여를 하는 것으로 정통성을 찾으려 합니다.”
인터뷰 = 노성열 전국부장
정리 = 곽시열 기자 sykwa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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