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 논설위원

1607년, 1617년, 1624년 3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쇄환사’가 조선인 포로 총 2000여 명을 데리고 한반도로 들어왔다. 1636년부터 쇄환사는 임진왜란 이전처럼 다시 ‘조선통신사’로 불렸다. 이후 1811년까지 200년간 조선통신사는 12차례 일본을 오가며, ‘믿음으로 통한다’는 통신(通信)의 뜻 그대로 선린 우호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까지 가는 데 5∼10개월이 걸렸다. 일본은 역대 통신사 접대에 100만 냥(약 4850억 원)을 썼다고 한다. 일본의 번주(지역 영주)들은 조선통신사 접대에 경쟁적으로 정성을 쏟았다. 자신의 지방 요리는 맛이 없다며 교토(京都)의 요리사를 특별 초빙한 번주도 있다. 당시 막부의 장군들과 번주들은 공식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를 대접하기 위해 무역항이던 나가사키(長崎)에서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내륙으로 들여와 특별 요리를 만들었고, 조선통신사 숙소에 별도의 음식 통로까지 마련했다. 조선에서 파견된 문인과 화가들이 당시 일본에서 누린 인기는 배우 배용준 못지않았다. 조선 전문인들이 선보인 ‘마상(馬上)’묘기는 일본인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조선통신사는 문화교류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류(韓流)의 비조(鼻祖)였던 셈이다. 조선 시대 신필(神筆)로 불린 화가 김명국은 일본 방문 당시 쏟아지는 그림 요청을 감당하지 못했다. 빠른 필치의 ‘달마도’가 일본에서 그려진 이유이다. 교토 쇼코쿠지(相國寺) 승려 다이텐은 조선 문인들을 찾아가 필담으로 우정을 나누고 헤어질 때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국과 일본 간 우호가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한·일 관계 개선 분위기를 타고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한·일 양국 지방자치단체와 학계의 노력도 활기를 띠고 있다. 400∼500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 행렬은 지난 5월 부산의 ‘조선통신사 축제’에서 재현됐다. 조선 사신(使臣)들의 ‘사행록’과 ‘필담창화집’(한·일 학자 간의 한자 필담 모음) 등이 전해지고 있고, 이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 기억돼야 한다. 평화와 친선의 사절단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올해 경색된 한·일 관계를 푸는 열쇠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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