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왈종 화백은 지난 6월 26일 제주 서귀포시 왈종미술관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밀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이왈종 화백은 지난 6월 26일 제주 서귀포시 왈종미술관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밀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이왈종 화백

이왈종(70) 화백이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 정착한 지 햇수로 벌써 26년째다. 1979년부터 10여 년간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화백은 1990년에 안식년을 받아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예 눌러앉았다. 지난 2013년 5월에는 서귀포의 정방폭포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왈종미술관’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지난 6월 26일 왈종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제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말했다. 칠순이 지난 나이를 의식한 말인 듯했다. 그러나 그의 ‘동안’인, 순진무구함마저 연상시키는 얼굴을 보면 ‘유통기한 운운…’ 하는 말은 지나친 겸양의 표현 같다. 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아직도 화랑가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제주에서의 일상을 화사한 색채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들이 미술애호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건강하다. 요즘에도 주 1회 반드시 인근의 골프장을 찾아 18홀을 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골프장에서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렸을 뿐 아니라 골프공에 그린 춘화(春畵) 전시회도 가졌다. 그만큼 그는 골프 마니아다. 건강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이왈종 화백과의 인터뷰는 먼저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며 시작됐다.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맞은편에 자리 잡은 왈종미술관은 전체 넓이 300평(약 992㎡) 규모의 3층 건물로 백자 찻잔을 연상시킨다. 이 화백이 1990년 추계예술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귀포로 들어가 20여 년간 살아온 터에 세워진 이 건물은 스위스 건축가 다비드 머큘로(Davide Macullo)가 설계했다.

미술관 1층에는 어린이미술교육실과 수장고, 도예실이 들어서 있고, 2층에 마련된 전시실에서는 그의 회화와 도자기, 목조각, 판화 등 100점에 가까운 작품을 볼 수 있다. 작품 수십 점을 한데 담아낸 비디오아트도 전시돼 있다. 한쪽에는 춘화집과 춘화가 그려진 술잔이 전시된 ‘미성년자 관람 불가’ 코너도 있다. 3층은 이 화백의 휴게실 겸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에는 이 화백의 작품이 프린팅된 소품, 판화 등을 판매하는 아트숍도 있다.

―제주도에 정착한 지 벌써 26년째입니다. 그동안 제주도 많이 변했는데요.

“처음에는 혼자 내려와서 치열하게 작업했습니다. 그때 비하면 열정은 사실 조금 식었어요. 늙기도 했고요.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 안 만나고 담백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요즘 요우커(중국인 관광객) 등 외지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와 제주가 변했다고들 하지만 저에게는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제 일상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여전히 제주는 기후가 좋고, 주변이 전부 꽃이고 아름다운 게 너무 많아요. 종교에서 천당과 지옥을 얘기하죠? 제게는 이곳 제주가 천당이에요.”

―그래도 처음 내려오셨을 때는 혈혈단신이셨는데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내가 혼자 밥 해먹고 그림 그리면서 냄비 태운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해요. 옆에서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그게 다 타도록 냄새를 못 맡았어요.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죠. 그래도 연일 시위로 시끄러웠던 대학가 상황 등 서울에서 의 복잡한 일 다 잊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가하고, 아무도 날 찾는 이 없고 그런 건 좋았습니다. 소일거리로 자전거 타고 숲 속을 돌아다녔는데 제주의 자연을 접하며 많은 것을 느꼈어요. 잡초 하나만 해도 그래요. 이름 없이 스러져 갈 야생풀인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 질서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이 사시사철 식물들이 자라고 성장해 소멸하는 게 다 인연에 의한 것인데 집착하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이러한 생각들이 후일 제 작품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세계’로 꽃피게 됐다고 봅니다.”

제주에 내려온 후 그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린 ‘제주 생활의 중도’ 시리즈를 계속해 내놓아 미술애호가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하늘로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인간보다 큰 새가 등장하며, 나무 속에서 사람이 뛰어논다. 일상 속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한 화면 속에 원근법을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어울려 표현된다.

―제주로 내려오기 전과 그 이후 작품세계가 변하셨나요.

“내가 긍정적으로 살면 그림도 밝게 표현되는 것 같아요. 행불행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내 주변 제주의 아름다운 것들을 열심히 그렸어요. 제주도에 내려오면서부터 차츰 그림도 화사해지기 시작했죠. 제 그림을 보면 동백이 많이 그려져 있어요. 매화도 많고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이 동백과 매화죠. 그래서 그 꽃들을 주제로 많이 그립니다. 그처럼 자연 속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일상을 회화적으로 잘 표현하니까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10여 년 전부터 조각 작품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요.

“사실 서울생활을 잊고 작업에 몰입하기 위해 시작했어요. 조각은 그림에 비해 품이 많이 들어요.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 하고. 그래서 잡념에 얽매일 틈이 없죠. 부조작업을 시작하니 작가들이 ‘그게 무슨 그림이냐. 너 정신 나갔냐’ 그래요.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러나 당시 내 처지를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밥풀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는 진짜 그분 심정이 이해돼요.”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만큼 이 화백의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가족과 합류했다. 자녀들 교육문제로 서울에 남아야 했던 부인 김예순(61) 씨가 합류했고, 2개월 전에는 영국 런던에서 텍스타일 디자인 공부를 하던 아들 이규선(35) 씨가 귀국해 왈종미술관 인근에 숙소를 마련하고 합류했다. 이 씨는 현재 왈종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다. 이씨와 한 살 터울 누이인 장녀 이오성(36)씨는 이화여대 미대에서 한국화 강의를 하고 있다.

―요즘 일상이 어떠십니까.

“제주에 처음 올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어요. 오전 3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작업을 하죠. 잠은 미술관 옆 6.6㎡(2평)짜리 황토방에서 자고, 작업실은 미술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어쨌든 새벽에 일어나 막걸리 한 잔은 안 빼먹죠. 작업하기 전 달 뜨고, 바람 불고, 벼락치고 하는 장면들을 술 한 잔 마시면서 바라보면 기가 막혀요. 기분이 좋으면 두 잔도 하죠. 사실 건강을 생각하면 술이 나쁠 수 있지만 벌써 친구들도 많이 떠나고, 난 이제 유통기간이 지났으니 이것저것 가릴 필요가 뭐 있나요.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되는 거지. (이 화백은 주량을 묻자 막걸리 두 병이라고 했다)”

―일부에선 이 화백의 작품이 너무 대중 편향적이라는 지적도 있던데요.

“제 그림은 우리 삶 자체 생활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갑자기 우주를 그릴 수도 없잖아요. 가보지도 않은 곳을 어떻게 그려요. 제 그림은 민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고백하지만 이발소 그림에서도 영감을 받았어요. 호랑이 소나무 달… 모두 너무 잘 그린 그림들이에요. 그림은 심각하게 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먹고살기 위해 그리는 겁니다. 난 예술지상주의는 아니에요. 전 세계에 훌륭한 작가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지만 이름 없이 사라진 작가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심도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고 단순해지죠.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 대신 이해하기 쉽게 그리려고 합니다 .”

이 화백은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의외였다. 그러나 오히려 어려운 용어로 포장한 그럴듯한 예술관보다 더 치열함이 느껴졌다. 그는 자기의 예술관을 얘기하며 ‘왈종’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원래 내 본명은 우종(禹鍾)이에요. ‘임금 우(禹)’자 쓰는 우종이지요. 찌그린 날일자 모양의 ‘왈(曰)’자가 아니고요. 다 사연이 있습니다. 옛날에 국전에 아홉 번 출품해 아홉 번 떨어진 적이 있어요. 친구들은 국무총리상, 대통령상 받는다고 하는데 나만 맨날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두 개를 출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왈종’과 ‘우종’ 두 가지 이름으로요. 그런데 왈종이란 이름으로 낸 작품이 국전에 입선했어요. 1974년도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이름을 왈종으로 바꿨어요. 돌이켜보면 그처럼 고생한 것이 오늘날 이왈종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당시 내 생각이 ‘난 재주가 없으니 열심히 그리자’였거든요. 처음에 유명하다가 존재도 없이 소멸한 작가가 많잖아요. 난 초심을 지키며 살아왔어요.”

이 화백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재학 시절에는 서울 안국동에 화실을 내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작업실도 남대문시장의 허름한 방이었다. 미술관 학예실장이기도 한 아들 이규선 씨는 이왈종 화백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제가 이해하기 쉬워요. 미술관에 오신 분들에게 작품 내용에 대해 설명할 때도 1분 안에 다 할 수 있어요. 보는 사람들이 바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 좋은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어렵지 않게 일상을 그리는 것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봐요. 실제로 아버지 차가 바뀌면 그림 속 차도 바뀌어요.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은 아버지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해요.”

이 화백의 그림에 ‘마치 한 편의 시를 대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감탄하는 이들도 많다. 화사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경쾌하다. 실제로 이 화백은 시를 좋아한다. 그리고 시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 화백에게 어떤 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이생진 님의 ‘성산포에서’라는 시를 좋아해요.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이 시를 외우는 데 1년 걸렸어요. 허허, 그래도 좋은 시여서 계속 흥얼거리며 작품을 만들었죠. 이 시에도 술이 바다와 비교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술은 예술가에게 영혼의 음식인가 봐요.(웃음)”

이 화백은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2012년에 ‘세계 어린이 돕기’, 2013년에는 ‘다문화 가정 돕기’, 2014년에는 ‘북한 어린이 돕기’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기금 마련 판화전을 개최해 매해 유니세프에 3000만 원을 기부했다. 지난 6월 2일에도 왈종미술관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유니세프 기금 마련 이왈종 판화전’ 및 한국유니세프 친선대사인 배우 안성기 팬 사인회를 마련했다. 그는 또 매주 화요일 미술관 1층에서 6∼10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미술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별히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있으신지.

“어린이는 미래 인류를 위한 희망의 상징입니다.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의 모습에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그래서 제 작품에도 자연과 어울려 뛰노는 해맑은 어린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이 상처 입고 다치면 안 되겠죠. 또 사람을 만드는 인성교육은 어려서부터 해야 합니다. 제가 제주에 내려와 계속 어린이미술교실을 운영하는 것도 인성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에요. 반장을 시켜 주면 수줍어하던 애들이 굉장히 활발해져요. 반장을 하는 날은 선물로 아이스크림도 하나 주고요.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돌아가면서 다 반장을 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애들이 아주 달라져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 화백은 “좀 더 밀도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기간이 1년이고, 2년이고 걸려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본인이 말한 대로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어도 역시 시공을 초월해 인정받는 작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왈종미술관 3층 옥상에 올라가면 섭섬과 문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뒤편으로는 운무에 이마를 적시고 있는 한라산 영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앞 330㎡(100여 평)의 화단에서 각종 꽃이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당근꽃, 깨꽃, 도라지꽃 등 토종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나 있다. 그런데 옥상을 둘러보다 보면 이색적인 조각이 한 점 눈에 들어온다. 높은 망루 위에 석회암을 깎아 만들어 올려놓은 ‘피리 부는 남자’ 조각상이다. 이 화백의 자화상이다.

“이 망루 아래 공간에 곱게 화장한 제 유골을 제주 흙이랑 섞어 도자기로 빚게 해 안치시킬 예정입니다.” 실제로 망루 밑 3층에는 ‘중도관’이라 지어진 작은 방이 있다. 엄숙해야 될 죽음에 대한 언급인데 이 화백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유통기한’ ‘천당’ 운운하는 그의 단어들이 일맥상통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얼마나 서귀포가 좋으면 죽어서까지 유골이 돼 한라산을 등지고,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것일까. 그의 모든 그림에 낙관처럼 쓰이는 ‘서귀포 왈종’도 이 화백의 서귀포 사랑에 다름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화백을 바라보니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치 ‘이왈종이 죽어서도 제주의 품속에 영원히 안기게 되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듯한 표정이다.

인터뷰 = 이경택 부장대우(문화부)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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