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국제 채권단이 제안한 구제금융 협상안 반대가 다수인 것으로 나타난 뒤, 그리스 아테네 의회 앞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오’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히(oxi)’가 적힌 깃발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정치 1번지’ 신타그마 광장은 ‘오히’ 승리 자축 시민 북새통
“더 어려운 처지가 되겠지만 더 이상은 순종하지 않겠다”
“그리스의 자존심 지키기위해 채권단 요구 반대” 한목소리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 1번지’ 신타그마 광장의 밤은 뙤약볕이 내리쪼이던 한낮보다 더 뜨거웠다.
그리스의 운명을 가르는 국민투표 결과가 ‘오히(oxi:반대)’로 드러난 5일 밤(한국시간 6일 새벽), 신타그마 광장은 대형 그리스 국기를 흔들고 불꽃을 터트리면서 ‘오히’ 승리를 자축하는 시민들과 전 세계에서 몰려온 취재진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개표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광장 한쪽에 자리 잡고 오히 캠페인을 벌여온 시민단체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모임’의 회원들은 스피커로 “유럽아, 잘 들어라.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고난을 이겨낸 그리스인의 끈기와 저력을 칭송하는 민요를 합창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7시 투표가 끝나자마자 TV 방송사들이 일제히 오히 승리를 전망하면서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하던 사람들은 어둠이 짙어지면서 점차 늘어나 어느새 광장을 가득 메웠다.
오후 9시가 조금 못 된 시간 정부가 투표 결과에 대한 잠정 전망치를 발표한 직후부터 파티의 열기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서도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고, 아테네 시청은 지하철 운행을 오전 2시까지 연장했다.
야당 신민당 등 채권단의 추가긴축 요구안을 지지하는 ‘네(nai:찬성)’ 진영 역시 신타그마 광장에서 집회를 가질 예정이란 소문이 돌았지만, 출구조사는 물론 초반 개표부터 오히 표가 앞서 나가면서 아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를 던진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그리스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그리스 국민을 극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채권단에 “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의지를 전하기 위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연금생활자인 50대 여성 요타 시노디투는 “5년 전에 비해 연금 수령액이 많이 줄었다”면서 “그리스 국민이 이제는 채권단에 ‘싫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70대 여성 역시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하면 그리스가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채권단에) 순종하지 않겠다”며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라고 말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국가”라면서 “그동안 무조건 ‘예스’만 해오다가 국민이 따귀를 맞았다”고 말하는 시민도 있었다.
한 시민은 유로라는 단일 통화 체제가 만들어진 뒤 유럽은 독일의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고 비난하는 팻말을 들어 시선을 끌었다. 이 팻말에는 ‘Germany’ 대신 ‘Ger Money Europe? No Thanks!’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국민투표를 앞두고 아테네 시내 곳곳에서 만난 시민들 중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여론조사에서는 ‘반대’와 ‘찬성’이 박빙을 이룰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시민들은 대부분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극심한 실업에 시달리고 있는 청년층과 연금 삭감을 두려워하는 노년층은 물론이고 중소 규모의 자영업자들 중 상당수도 “그리스의 자존심을 나타내기 위해 채권단의 요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반대가 다수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리스가 유로존으로부터 탈퇴 또는 퇴출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강하게 나타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반대는 곧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국민투표에서 ‘강력한 반대’ 의사를 나타내줘야 채권단과의 협상을 보다 힘있게 밀어붙일 수 있다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주장이 5년 넘게 이어진 긴축으로 지친 유권자들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믿음이 과연 현실로 입증될지는 미지수다. 찬성표를 던졌다는 60대 택시 운전사는 “그리스는 유럽이 필요하다”며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해도 그리스의 탈유로존은 없다는 치프라스 총리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