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난’은 ‘재난 그 이후’로 비로소 정확한 제자리를 찾고 의미를 얻는다. 예상할 수 없는, 예상했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거나, 혹은 예상을 넘어서 벌어진 재난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원인을 찾고,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재난 그 이후’의 끈질긴 작업,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재난 그 이후’의 집요한 노력이 없으면 재난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흘러가, 때로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단발성 뉴스 이상이 되지 못한다.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최대 피해지인 미국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90년 전통의 메모리얼 병원에서 벌어진 닷새 동안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재현한 책은 제목대로 ‘재난 그 이후’ , 진실을 밝히려는 치열한 노력의 전범이다.
당국이 제대로 된 구조를 하지 못하는 사이, 의사와 환자들은 병원에 고립되고, 환자들 구조 순서가 정해지더니, 살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두고 떠나야 하는 의사들 사이에서 이들을 안락사시키려는 시도가 벌어진다. 현실에선 이를 주도한 의사와 간호사 두 명이 2급 살인 혐의를 벗고 무죄로 풀려나지만 의사 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6년간 500명이 넘는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한다.
미국 탐사보도의 아름다운 전통을 잇고 있는 책은 그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하고, 그 어떤 영화보다 생생하다. 재난이 거듭되고, 더 큰 재난에 지난 재난이 묻혀 잊히기를 거듭하는 우리 사회에 ‘재난 그 이후’, 진실을 향한 끈질긴 노력은 큰 울림을 주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재난이후, 무엇을 했는가.
저자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5년 9월 11일. 허리케인이 발생한 지 2주가량이 지나고, 생존 환자와 직원이 모두 병원을 떠난 지 일주일 이상이 지난 뒤였다. 그제야 시신 수습반이 메모리얼 병원에 들어가 시신 45구를 수습한다. 수습반에 앞서 생존자 수색을 위해 병원에 들어간 목사 한 명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본 광경을 단테의 ‘신곡’ 속 장면에 비교했다. ‘그야말로 지옥의 모습이었다.’ 예배당은 당시 고립된 병원에서 사망한 환자들을 옮겨놓은 안치소였다. 다른 병원에 비해 사망 환자가 너무 많은 데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병원 탈출 마지막 날, 의사들이 생존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안락사시켰다는 소문이 번져 나왔다. 저자는 소문을 쫓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책은 2부로 구성됐는데 1부는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기 하루 전인 2005년 8월 27일부터 전원이 탈출한 31일까지 닷새간 이야기다. 당국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병원 시스템은 무너진 상황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준다. 27일 허리케인 예보가 나오면서 병원에서는 비상상황에서 환자들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지만 별다른 대응은 이뤄지지 않았다. 28일 카트리나가 강타하고, 시장은 주민들에게 도시에서 즉시 대피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결정 과정에서 시간을 허비해 주민들 상당수는 대피하지 못한 채 대형 경기장 슈퍼돔으로 몸을 피한다. 29일 제방이 무너지면서 물은 불어났고, 평소에도 비만 오면 지하층이 잠기던 메모리얼 병원도 물에 잠긴다. 창문은 깨지고, 비는 새고, 전기는 끊겨 생명유지 장치 가동이 중단된다. 구조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구조대와 병원 간 엇박자가 나면서 구조의 속도는 붙지 않는다.
닷새째인 31일, 마지막까지 병원을 지키던 의사와 환자들이 모두 빠져나가게 된다. 이동이 불가능하고, 생존가능성이 없는 환자들, 스스로 DNR(심폐소생술 거부) 결정을 내린 환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간호 부장이자 사고대응지휘관 역을 맡은 수전 멀더릭과 경부외과 전문의 외과의사 에너 포는 안락사에 합의한다.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힌 의사도 있었지만,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의사도 꽤 많았다. 주변의 제대로 된 도움이 닿지 않고, 제대로 된 시스템이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처럼 중요한 결정이 한두 사람의 선택으로 진행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안락사의 윤리성과 재난속 생명구조원칙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책은 병원의 비상위원회가 총 237페이지에 달하는 허리케인 대비계획안을 마련해 놓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비상대책위와 병원은 왜 엇박자를 이뤘는지도 살핀다. 이어 안락사를 주도한 의사와 간호사가 법정에 서지만, 병원의 정치력과 의사협회의 옹호로 불기소되는 과정,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수 없는 환자 가족의 분노와 움직임이 책의 2부에 담겨 있다.
카트리나 발생 5년 뒤인 2010년, 메모리얼 병원에서의 5일간을 다룬 기사는 뉴욕타임즈 등에 보도돼 퓰리처상을 받았고, 여기에 뒷이야기를 덧붙인 책은 2013년에 출간돼 그해 전미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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