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 정치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타고난 정치 승부사다. 그는 언제 누구와 어떤 쟁점으로 싸워야 할지 정확하게 집어낸다. 대상을 정하면 통념을 넘어서는 수단을 동원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공세를 가한다. 그 서슬과 담대함에 측근들조차 후유증을 우려하지만 결과는 대부분 박 대통령의 의도를 배신하지 않았다. 4·29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정부의 특별사면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나, 국회법 개정 파문과 관련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4·29 재·보궐선거는 여당의 완승으로 끝났고,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의 표적이 된 지 13일 만에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면 헌법의 수호자로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배신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심판’ 운운하며 유 의원의 사퇴를 강요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 사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여당 특히 원내사령탑이 정부·여당의 경제살리기를 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치를 자기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한 것은 배신의 정치로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의원은 결국 사퇴했지만, 박 대통령의 주장과 요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유 의원은 우선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의원총회를 통해 직접 뽑는 원내대표에게 대통령이 사퇴를 요구하는 것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했다. 유 의원이 사퇴 기자회견을 굳이 ‘의원총회의 뜻을 받들어 사퇴한다’는 말로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 의원은 이어 여당과 국회의원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은 이유’를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법과 원칙은 지난 4월 8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되짚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역대 정권마다 여당이 정부와 청와대의 거수기 역할만 해오던 일’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규정했다. 즉, 박 대통령이 여당을 마치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해야 하는 존재쯤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대통령이 국회를 정치 모리배 집단으로 몰아붙이면서 ‘국민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은 3권 분립의 한 주체인 국회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당의 국회 내 리더인 유 의원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등의 주장을 한 것은 대선공약을 스스로 부인한 것으로, 책임정치 차원에서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그의 주장대로 박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인식은 우리 정치의 정상화 차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 3권 분립에 대한 확고한 인식 위에 정당 민주화가 정착돼 국회의원이 자기 소신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고,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 선출이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의 공천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국회 전체를 싸잡아 원색적으로 비난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여당이라도 국회의원 160여 명이 직접 뽑은 원내대표를 겨냥해 사퇴를 촉구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제의 원조인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필요한 법안이나 예산에 대한 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하거나 비공식적으로 백악관으로 초청해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은 3권 분립에 대한 인식이 체화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행정부는 정책을 실행하고 예산을 집행하지만, 정책의 근거가 되는 법을 만들고 예산을 배정하는 일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군부독재 시대가 종식되고 제도적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과거 권위주의적 관행과 인식 때문에 ‘제왕적 대통령’ 문제는 여전히 우리 정치개혁의 주요한 화두다. 최근 ‘입법독재’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이는 국회의 파행적 운영 때문이지 입법·행정 간의 균형추는 여전히 행정으로 기울어 있다. 유 의원 사태는 균형을 잃은 3권 분립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고 따라서 박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유승민은 언제든 나올 수 있다. 3권 분립의 핵심 전제는 행정·입법·사법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나, 시스템에서나, 존중해야 존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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