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 ‘황무지’로 널리 알려진 영국 시인 ‘엘리엇’이 떠올랐다. 전자는 이 펀드 설립자 P E 싱어의 중간 이름(Elliott), 후자는 T S 엘리엇(Eliot)의 성으로 철자는 다르지만 한글 표기가 같기 때문이다. 이들과의 연관어들이 묘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면서 일순 군걱정(?)도 들었다. ‘엘리엇 급습으로 삼성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는 황무지로 변하고, 7월은 잔인한 달이 될 텐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둘러싼 삼성과 엘리엇 간 44일간의 ‘혈투’가 삼성의 판정승으로 일단락됐다. 통합 삼성물산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1차 관문을 넘어섰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도 일단 순탄해졌다. 우리나라 간판 기업의 경영권이 단기 차익을 노린 ‘알박기 펀드’에 건건이 트집 잡힐 뻔한 고비를 넘겼으니 국가적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삼성 신승(辛勝)은 우리에게 숱한 난제를 남겼다는 점에서 ‘피로스의 승리’에 비유된다.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이루면 우린 끝장이다.” 기원전 280년 그리스 피로스 장군은 로마에 대승을 거둔 뒤 이렇게 말했다. 희생자를 너무 많이 냈기 때문이다. 이후 이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으로 기록된다. 이번 사태가 독이 아닌 약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위장된 축복’으로도 불린다. 이제 각 경제주체들이 자축문이 아닌 반성문부터 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삼성의 실책부터 짚어보자. 우리 국민은 종종 삼성 앞에 ‘천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삼성이라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국민 신뢰가 녹아든 칭송인 셈이다. 그런 ‘천하의 삼성’이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일개 헤지펀드에 휘둘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다수 국민은 실망감과 함께 배신감마저 느꼈을 게다. 한 예만 복기해 보자. 기업이 합병 작업을 할 때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주 동향 파악이다. 더욱이 오너의 경영권 승계와 직결되는 합병이 아니던가. 이런 마당에 엘리엇의 고위 책임자가 합병 발표 40여 일 전에 이 회사 측에 투자 관심을 내비쳤는데도 기습 공격을 당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관리가 완벽하다는 삼성의 명성이 무색할 뿐이다. “삼성은 대한민국 국보다. 그런 삼성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분노가 치민다.” 한 전직 경제부처 장관의 격정적인 토로가 삼성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지배구조를 선도하는 모습도 부족했고,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노력도 게을리했다.
국회·정부의 반성 몫도 작지 않다. 경영권 방어장치가 허술한 우리 대기업의 빈틈을 헤집고 다니는 투기 자본은 활개를 치는데 국회는 소수 주주 보호라는 명분 아래 경영권 방어를 제한하는 법안들만 쏟아낸다. 차등의결권주와 황금주 등 경영권 방어를 돕는 법안 처리는 안중에도 없다. 경영권 방어 수단이라야 자사주 처분이 고작이다. ‘먹튀(eat-and-run)자본’이 우리나라에서 배를 채우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삼성은 소액 주주와 국민연금공단이라는 애국자들의 힘을 빌려 이번 난관을 해결했다. 그 대가로 기업 논리를 넘어선 국민 요구를 더 많이 충족시켜야 할 리스크도 떠안게 됐다. 보다 적극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압박도 커졌다. 진정성 어린 ‘주주친화 경영’도 실천해야 한다. 오너 역량에 대한 국민 감시가 더 깐깐해졌으니 새 비전과 철학도 제시해야 한다.
정부·국회 책무도 더 무거워졌다. 이제라도 오너 경영체제의 순기능을 지속적으로 살려 나갈 새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론의 장’이 마련돼 국민 공감대부터 형성돼야 한다. 기업들이 투기자본과 반기업 정서의 속박에서 빠져나와 투자·일자리 창출 등 본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실질 대책도 내놓아야 한다. ‘착한’ 헤지펀드는 기업의 경쟁력과 거버넌스를 높이는 ‘메기 역할’도 한다. 그렇다고 지배구조가 허술한 우리 대기업 현실에서 선진국이 허용하는 여러 경영권 보장 제도 도입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국민연금도 당분간 우리 기업을 지키는 백기사역을 자임해야 한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건 힘이 세거나 머리가 좋은 종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이라고 말했다. 이번 엘리엇 사태를 계기로 우리 대기업들은 물론 정부, 국회 등 각 경제주체들이 늘 되새겨야 할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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