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전공한 30대 후반의 여성이 ‘음식’을 배워볼 심산으로 어느 날 일본 삿포로(札幌)로 떠났다. 할 줄 아는 일본 말이라고는 딱 세 마디 뿐. 음식을 배우자면 말부터 배워야 했다.
이렇게 유학생활을 시작한 저자는 식도락의 도시 삿포로에서 일상으로 드나들던 음식점과 음식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글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림에다 가볍게 그날의 경험과 식당의 분위기, 음식의 맛 등을 글로 버무려 놓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유학생이 2년여 동안 삿포로에 머물며 가본 114개 식당과 거기서 맛본 모든 음식의 기록이다.
이 책은 맛집 가이드북이 아니다. 책에 소개되는 식당과 음식은 엄격하게 선별되지 않았고, 값비싸거나 고급스러운 음식도 없다. 책에 등장하는 식당들은 저자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뻔질나게 찾아갔던 소박한 식당들이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맛에 대해서만큼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단호한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케이크와 달콤한 디저트를 다룰 때만큼은 좀 수다스러워지는 눈치지만, 대부분 음식의 맛 평가는 싱겁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다. 칭찬해도 ‘맛있다’ ‘배불리 먹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어떤 음식 앞에서는 평가를 주저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카레를 내는 식당에서 ‘인도인들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집일지도 모르겠다’는 식이다. 심지어 음식 맛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어디 한 번 먹어볼까’라는 말로 맺는 글도 있다. 음식의 맛을 두고 온갖 미사여구와 과장이 난무하는 시절이라 그런지 저자의 이런 솔직하고 담박한 시선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맛 대신 저자가 관찰하는 건 식당의 분위기와 거기 온 손님, 음식의 조리과정과 담음새, 음식량의 많고 적음 같은 것들이다. 맛 말고도 식당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정성껏 그려낸 식당과 음식 그림을 보는 재미도 있다.
특히 음식그림에는 손글씨로 재료와 조리법 등을 꼼꼼하게 적어두었다. 식당이나 음식뿐만 아니라 삿포로에서 파는 71가지 맥주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서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의 그림을 손글씨와 함께 인쇄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치 저자의 화첩이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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