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시인 두보의 고향 중국 허난(河南)성 궁이(鞏義)시에서 열린 ‘제1차 국제 두보 축제’에 다녀오며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어보자. 소설 ‘삼국지’ 말미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나라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 재상 두예(杜預)의 후손답게 꽤 넓게 터를 잡은 두보의 고향 집엔 1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두보의 묘지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되고 있는 성역화 작업이었다. 어림잡아 덕수궁 넓이만 했다.
모든 게 컸다. 입구에 세운 두보의 상(像)은 조각상이라기보다 거대한 설치미술이었다. 좀 몰상식하군 하고 비판을 하려다 중국 중원의 것은 모두 크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비판을 접었다. 열 번짼가 되는 중국 여행 중 처음 가게 된 중원이었다. ‘중원(中原)을 차지하는 자가 천하를 차지한다’는 중원!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연속. 우리나라 1번 국도 남쪽의 어느 지점에 가면 한국에선 유일하게 사방에 산이 보이지 않는 김제평야가 있다. 중원은 그 평야를 십여 개씩 묶어 여기저기 풀어놓은 형국이었다. 귀국하기 전날, 낙양 서북쪽에 있는 중국의 국화인 모란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농장의 꽃밭을 구경했다. 하도 커서 넓이를 물었더니 대략 이백만 평이라고 했다. 물론 군데군데 다른 꽃도 심어져 있었지만, 얼추 여의도 크기에 맞먹는 모란 꽃밭이었다.
주최 측은 중국어를 모르는 나 혼자만을 초청하지 않고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김영명 선생을 내 통역으로 묶어 두 사람을 항공료와 일당 포함, 체류비 초청자 부담으로 초청했다. 게다가 그들은 축제가 끝난 후 내가 원한다고 나와 김 선생을 일정에 없는 2박까지 시켜주며 안내원을 둘이나 동원해서 궁이에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낙양 관광을 하게 해 주었다. 손이 컸다. 제1회라선지 외국에서 온 시인이 적어서 그중 나이가 많은 내가 축제 날 두보 후손들과 궁이시 임원들로 구성된 행렬 다음 중국 시인들이 포함된 시인들의 행렬 제일 앞에서 걸어나가 묘지에 꽃을 바쳤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 축제였다.
두보 문학 토론회에선 중국말을 모르는 나를 위해 맨 처음에 발언하게 해 주었다. 옆에 앉아 내 발표와 다른 이들의 발표를 동시 통역하는 김 선생의 고역을 생각해서 발표를 서너 개 듣고는 회의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호텔 방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전화로 텔레비전 인터뷰 요청이 왔다. 토론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나처럼 미리 나온 사람들이 모인 호텔 로비에서 인터뷰를 했다. 대부분이 두보의 사회 참여 시, 예컨대 ‘병거행’이나 ‘석호리’를 높이 평가하는데 물론 그 평가는 옳다. 그러나 안사란(安史亂) 때 아들과 딸을 굶겨 죽이기도 하고 자신도 폐결핵과 당뇨로 만년에 눈까지 거의 먼 두보가 마지막까지 밝은 정신으로 ‘등고(登高)’와 ‘등악양루’ 같은 격이 높은 시를 쓴 인간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보의 인간적인 ‘착한’ 면을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착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통역이 있지만 모르는 말로 인터뷰하는 사람이 민망하지 않도록 많지 않은 주위 사람들이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주최 측의 배려로 다음 날 오전까지만 궁이 관광을 하고 차를 내주어 낙양으로 향했다. 책이 많이 팔리면 ‘낙양의 종이 값을 올린다’라는 말이 오래전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글 쓰는 사람들이 ‘혹시나 내 책도’ 하며 가슴 두근거리게 한 지명이었다. 도착하니 그곳 출신 젊은 남녀가 차를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보겠다고 벼른 ‘룽먼(龍門)석굴’부터 갔다.
남북조시대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낙양 시내에서 북쪽으로 꽤 넓게 흐르는 이허(伊河) 강변 산언덕에 조성하기 시작한 이 석굴 무리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때까지 만들어진, 크고 장엄한 불상석굴들의 집합이다. 젊은 안내인들이 속도 조절은 했지만 그래도 빠른 그들을 따라가느라 중요한 것을 빼고는 대충 보았는데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우리나라 석불들의 원형이 여기 있었구나 생각했다. 북위의 제일 뛰어난 군주였다는 효문제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근엄한 석가상, 그리고 당나라를 뒤흔들었던 여제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다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로자나불상 같은 거대 석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만 점이 전시되었다는 소형 불상들까지 자세히 보면 모두 위엄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기가 죽었다. 그러나 오래전 텔레비전으로 ‘둔황(敦煌)석굴’을 보며 충격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룽먼석굴 가운데 제일가는 하나를 뽑아 우리의 석굴암과 비교한다면 석굴암이 결코 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눅였다.
작년 여름 경북 청송에서 열린 ‘한중문학대회’에서 처음 만나 청소년기의 내 문학경전이었던 ‘두시언해’로 이해하고 즐긴 두보 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중국과 한국과 세계의 현대시에 대해 몇 차례 대화를 한 인연으로 이번 축제에 초청해준 왕자신(王家新) 시인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조선족 출신이지만 중국인이 되고도 남는 김영명 선생을 비롯해 중국인들과 함께 여행하며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생각해온 것보다도 더 심한 ‘빨리빨리’의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늦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만만디(慢慢的) 만만디’ 성정을 익혀야겠다고 광활한 중국 중원 한가운데서 나는 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