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 / 체육부장

한국 스포츠는 예로부터 투지를 강조해 왔다. 다쳤다는 이유로 출전을 포기하면 정신력이 해이해졌다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아프다는 건 결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농구 9단’ ‘농구대통령’으로 추앙받는 허재가 좋은 예다. 왼손잡이인 그는 선수 시절 왼손으로 공을 다루다 왼손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의 인대가 끊어졌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출전을 강행한 탓에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첫째 마디는 구부러진 채 굳어졌다.

통증이 심하면 ‘대포주사(데포메드롤)’에 의지하곤 했다. 국내 스포츠계에선 강력한 진통제 주사를 대포주사로 통칭한다. 과거엔 통증이 심하고 성치 않은 몸이지만 팀을 위해, 조국을 위해 대포주사 ‘한 방’ 맞고 게임을 치르는 게 미덕이었다. 그런데 대포주사, 즉 데포메드롤엔 금지약물이 포함돼 있다. 국내에서도 프로리그를 중심으로 도핑 테스트가 강화되면서 대포주사는 예전처럼 애용되지 않고 있다.

대포주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상투혼은 선수에겐 지켜야 할 ‘의무’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해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렸던 인천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의 196㎝ 장신 공격수 김신욱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A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태클에 걸려 쓰러졌고 오른쪽 종아리뼈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당시 김신욱의 몸 상태를 살폈던 스포츠의학 전문가는 “출장을 강행할 경우 부상 부위가 더 커질 위험이 있으니 더 이상 출전하지 않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김신욱은 북한과의 결승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지자 연장 후반 3분 김신욱이 교체 투입됐다. 대표팀은 연장 후반 추가 시간에 결승골을 넣으면서 1-0으로 이겨 1986 서울아시안게임 이후 28년 만에 금메달을 되찾았다.

하지만 김신욱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무리한 결승전 출장 탓에 종아리뼈 부상이 악화됐고 김신욱에게 아시안게임 결승전은 2014년의 마지막 출장이 됐다. 소속팀인 울산 현대로 복귀했으나 게임에 나서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9월 부임한 뒤 김신욱은 계속 대표팀에서 제외됐고, 지난 20일에야 비로소 태극마크를 다시 가슴에 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재활 과정을 거쳐 회복했지만, 자칫 선수 생명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뻔했다.

대한체조협회는 21일 ‘도마의 신’ 양학선을 오는 10월 열리는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 출전 대표팀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양학선은 지난 14일 끝난 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기권했다. 양학선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계속 출전하겠다는 부상투혼의 뜻을 밝혔지만 의무진과 체조협회에서 만류했다. 양학선은 2012 런던올림픽 도마 금메달 획득 이후 허벅지 뒤쪽 근육 부상에 시달려 왔다. 이번 세계선수권엔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지만, 양학선에겐 부상을 치료할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고 체조협회는 판단했다. 정답이다. 무엇보다도 선수 보호가 최우선이다. 선수생명을 단축하는 부상투혼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jhlee@munhwa.com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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