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남아 있는 좁고 긴 골목길.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남아 있는 좁고 긴 골목길.

(6) 박완서 딸 호원숙이 본 ‘그 많던 싱아는…’ 의 현저동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길을 나섰다. 현저동을 찾아서.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라는 청탁을 받을 때마다 무슨 핑계라도 대면서 피하고 싶고 뒤로 물러나고 싶다. 그러나 곧 마음을 추스르면서 하겠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엄마가 나에게 시키는 심부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려면 적어도 내 발로 현저동 땅을 밟아보아야 한다는 것. 어머니의 문학에서 공간과 시간은 날줄과 씨줄이 잘 짜인 피륙과 같다. 엄마의 첫 서울행을 묘사한 그 탁월한 장면들, 지금도 펼쳐보면 너무 생생해서 외할머니의 그 칼칼한 치마폭과 인력거꾼이 바람결에 지금도 나타날 것만 같다.

“마침내 서울이었다. 과연 개성역보다 몇 배나 더 넓고 복잡한 구름다리를 우리 모녀는 맨 나중에 처져서 헉헉대며 올랐다. 많은 보따리 때문이었다. 딴 사람들은 웬만한 짐도 빨간 모자 쓰고 곤색 양복 입은 짐꾼한테 맡기는데 엄마는 우리 보따리를 죄다 한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고약한 꿈속에서처럼 허우적대고 있었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48, 웅진지식하우스, 1992)

어머니는 1938년의 첫 서울행을 소설을 통해 이렇게 표현해 기록하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의 영향으로 허룩해진 시내로 차를 몰고 현저동으로 향한다. 그리고 지금은 독립공원이 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공원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주일의 좀 이른 시간이라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간다. 아무리 공원과 기념관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지만 살벌하고도 옥죄는 듯한 기운이 전해진다. 그때 나에게 구치소 입구의 광장은 왜 그렇게 넓고 황량하고 사막 같아 보였을까. 엄마와 함께 구치소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오던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비수와 같이 꽂히는 기억의 조각이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염천인데도 마음이 저려온다.

이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여기 오지 않았으리라.

전중이(징역살이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들이 입던 옷이 전시되어 있다. 엄마가 어릴 때 형무소 앞 마당에서 만난 죄수들이 입던 옷이다. 어머니의 글 속에 묘사돼 있는 빛깔 그대로이다. 무명을 진흙탕물에 담근 것 같은 색깔이다. 어머니의 유년의 미끄럼틀이었던 서대문형무소 앞 언덕, 바지를 다 해뜨려 야단을 맞았던 장소, 그리고 거기서 만났던 머리를 박박 깎은 전중이들.

그러나 나에게는 ‘조그만 체험기’(문학동네, 1999)의 그 여름날 모녀가 아버지를 면회 왔던 그 공간이다. 민주투사도 아니었고 다만 세운상가에서 가게를 하던 아버지가 불량전구를 팔았다는 이유로 구치소에 갇혔던 그 여름의 기억이다. 뜨거웠던 날 구치소 광장에서 입이 타게 순서를 기다렸던 엄마와 하얀 모시 한복을 입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져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다.

나는 며칠 뒤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슬러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독립문역에 내려 현저동으로 향한다. 아무리 산동네를 개발하여 고층아파트가 되어 있지만 옛 동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좁고 긴 골목의 낡은 옛집들, 옥바라지하던 사람들이 잠을 자던 여관들, 골목에 심은 분꽃 화분, 오랜 시간 그 골목에 밴 냄새들.

나는 아파트 사이로 난 가파른 층층 계단을 오른다. 직선의 계단이 부자연스럽지만 그 층계는 인왕산으로 연결되고 좁은 길을 오르면 빌라 같은 주택들이 나오고 또 그 사이 계단으로 오르니까 텃밭이 나온다. 조용하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엄마가 다녔을 길.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빼먹을지도 모른다는 그 풀숲의 황량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아무리 개발하고 정비를 했더라도 공간의 흔적을 숨길 수 없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그대로 놓아둔다. 땀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다. 숨이 차듯이 올라와야 할 것 같다. 성벽이 나온다. 서울의 문밖과 문안을 구별해주고 경계선인 성벽, 그 성곽을 가르는 길에는 경비초소가 있고 초소에는 아직도 솜털이 보소소한 나이 어린 경찰이 친절하게 국사당 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 초소에서 다시 뒤돌아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현저동에서 인왕산 국사당 가는 길에 본 선바위.
현저동에서 인왕산 국사당 가는 길에 본 선바위.

“여름에도 인왕산의 살벌함은 변하지 않았다. 계곡은 장마가 져야만 물이 조금 흘렀고 굿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암벽이었고, 오른쪽으로 잡목숲이 좀 남아 있는 곳에선 어스름 녘이면 개를 때려잡는 처절한 비명이 들리곤 했다. 사내애들은 그 소리만 들리면 눈빛을 번득이며 떼를 지어 숲 속으로 치닫곤 했는데, 개를 때려잡기 위해 매단다는 나무도 정해져 있었다. 그 나뭇가지엔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고 주위엔 개를 그스른 누릿한 냄새가 늘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헐벗은 숲이 무섭고 구역질이 났다.

더위가 심해지면서 진중한 오빠도 방에서 견디기가 힘든지 저녁만 먹고 나면 내 손을 잡고 선바위까지 바람을 쐬러 올라갔다. 나는 그때가 가장 즐거웠다. 선바위에 바람을 쐬러 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빠가 제일 잘나 보이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빠와의 친밀감을 과시하기 위해 멀리까지 가서 조리풀을 따다가 오빠한테 붙들게 하고 조리를 엮었다. 조리풀을 뜯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먹을 만한 풀을 찾았지만, 선바위 주위 척박한 땅에는 모질고 억센 잡풀밖에 자라지 않았다.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 말수 적은 오빠도 내 향수를 알아차리고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여주곤 했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96)


국사당은 무당집과 작은 절집들이 모여 있는 계곡 마을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있다. 흰 한복을 칼칼하게 입고 머리에 쪽을 찌고 비녀를 꽂은 무당이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서성이고 있다. 마치 공연을 앞둔 막 뒤의 무용수와 같다. 헉헉거리며 올라오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날카롭다.

서대문구의회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현저동의 모습.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인왕산 아래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정하종 기자 maloo@
서대문구의회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현저동의 모습.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인왕산 아래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정하종 기자 maloo@

“인왕산 빨래터의 맑은 물에 두 다리 담그고 앉아 빨래를 부비는데 저만치 국사당에서 덩더꿍덩더꿍 굿하는 소리라도 나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사람 사는 거란 무엇일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생각답지 않게 손끝을 저리게 하는 어른스러운 기분을 느끼곤 했다.”(‘엄마의 말뚝’ p.70, 문학사상, 1980)

선바위까지 이르는 계단을 오른다. 글에서 보았을 뿐 처음 다가가 보는 바위이다. 서울 안에 이렇게 기이한 바위가 있었다니. 서울 속에 태고가 숨어 있는 듯하다. 바위 앞에서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는 젊은 외국 여자를 만난다. 네덜란드에서 왔다고 한다. 여행을 왔느냐고 물어보니까 공부하러 왔다고 한다. 더 이상은 묻지 않는다.

그 바위를 보고 치성을 드렸던 사람들의 손 비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암벽 앞에 밝혀 놓았던 촛불이 일렁거리는 듯하다. 지금은 땡볕이 바위를 끓이고 있는 듯하지만.

다시 성곽 길로 올라와 문안과 문밖의 경계선에 섰다가 성곽길을 따라 사직동으로 내려온다. 엄마가 현저동에서 인왕산을 넘어 매동국민학교에 다녔던 길이리라. 현저동 주소를 속이고 학군위반을 해서 문안학교로 다녔던 길이다. 잘 조성된 공원의 정갈한 길을 내려오며 마음속에 불안감이 가라앉는다. 산동네를 억지로 없애고 개발한 아파트와 불안하고 가파른 계단과 무당집 벽에 그려진 괴기스러운 그림들 그리고 압도하는 듯한 검은 선바위를 한꺼번에 보고 내려오는 길이어서일까?

그러나 나에게 편안한 안도감을 느끼게 하려고 이 글을 쓰게 한 것은 아니었으리. 아직도 나에게는 어머니 글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야 하는 책무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환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282~283)


내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꺼내보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고의 전환. 찰나적으로. 나는 주문처럼 그 구절을 되뇐다. 어머니 문학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또 미래의 사람들에게. 잘 짜인 피륙이 펼쳐진 것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글은 놀랍게도 나의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내 발걸음에 힘을 돋우고 집중하게 한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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