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인 김용택의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내가 태어나 자라고 산 곳은 섬진강가 작은 마을이다. 마을에서 강까지 몇십 미터 거리다. 동네 사람들은 온종일 강을 보고 산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을 건너다녀야 한다. 임진왜란 때 피란지였다고 한다. 마을이 생길 만한 곳이 아닌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논과 밭이 많지 않고 먹고 살기 팍팍한 곳이다.
강 건너 앞산이 늘 코앞으로 다가와 시야를 가린다. 내가 태어날 때 마을은 서른 가옥이 넘었다. 나는 그 마을 중간쯤에 있는 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 오셨고, 어머니는 열일곱 때 안양방직공장으로 징용을 당하셨다. 일본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방직공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결혼하여 나를 낳고 6·25전쟁 때 이웃 순창으로 피란을 갔다 오신 후 지금 내가 사는 작은 집을 짓고 산다. 지금 집을 두 채 새로 짓고 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이웃인 큰집이다. 나는 48년 쥐띠다. 내가 태어나고 조금 있다가 전쟁이 터지고 나도 부모님을 따라 피란 갔다 왔다. 피란 갔다 온 어느 날을 어머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그 말을 받아 적은 아내의 글을 여기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난리 나서 피란 갔다 돌아와 봉게 집도 불타버리고, 동네가 집터만 남았더라. 된장, 간장이 있냐. 곡식이 남았냐. 싸울라면 그냥 즈그끼리 싸우지. 옘병헐 놈들이 집은 왜 다 태우고 장독은 왜 깨부수고 지랄들이야. 우리들은 어쩌라고.” 지금도 그래요.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폐허 위에 집을 짓고 장을 담그며 살았다. 우리들의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이 맨손으로 살림을 시작하셨다. 몸이 부서져라 강을 건너 산을 오르고 작은 논과 밭을 일궈 자식들을 길렀다.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하여 농사를 지었다. 나는 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 그 마을에서 40분쯤 걸어가면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갔으나, 교실은 없었다. 운동장에서는 군인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운동장 가에 있는 벚나무 아래서 공부하다가 비 오면 집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순창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자취를 하였다.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있는 순창농고(현 순창제일고)를 다녔다. 논과 밭이 많은 학교였다. 농사짓는 기술공부보다 농사를 짓는 시간이 많았다.
공부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공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공부해서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졸업하면 집에서 농장을 하고 싶은 게 내 막연한 미래였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많이 보았다. 영화 볼 돈이 없어서 점심을 굶고 그 쌀을 팔아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극장 앞에 가서 어슬렁거리다가 20~30분쯤 지난 영화를 공짜로 보았다. 교과서 외에 책을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손창섭, 이광수 정도의 이름을 알았던 것 같다. ‘잉여인간’이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한다. 교과서에 나온 단편들을 읽으며 봄 잔디밭을 서성거리던 기억이 나고 신문에서 김수영의 유고 시를 읽은 것 같은데, 왜 내가 김수영을 그리 오래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중에 내가 시를 혼자 공부할 때 ‘아아아, 그래 맞아. 이 시인이 김수영이었어’ 했다.
순창농고를 졸업하고 집에서 오리를 키우다가 망하고, 서울에 가서 한 달 있다가 집으로 와서 놀다가 시험을 보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사람이 선생이 될, 그럴 때가 있었다. 나는 내가 졸업한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교사가 한 학교에 5년 있으면 다른 학교로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이웃 학교로 가서 1년 있다가 얼른 덕치초등학교로 와서 또 5년, 이렇게 갔다 왔다 하다 여섯 번째 덕치초등학교에 와서 2008년도에 교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덕치초등학교에서 36년을 살았다.
어느 날이었다. 그렇다 그 어느 날이었다. 그날 학교로 월부 책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책을 샀다. 일곱 권짜리 ‘도스토옙스키’ 전집이었다. 사놓고 보지 않았다. 보려고 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윗목에 두고 있었다. 방에 책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정말 심심해서 책을 읽었다. 어? 재미있었다. 방학 내내 그 책 일곱 권을 다 읽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또 책을 가지고 왔다. 헤르만 헤세 전집이었다. 나는 그렇게 월부 책으로 소설을 읽다가 어느 날 전주에 가게 되었는데 헌책이 너무 많았다. 헌책을 지게로 짊어져 날랐다.
책을 읽다가 보니, 생각이 많이 나서 그 생각을 일기로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웠다. 그리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심심해서 책을 읽고 책을 읽으니, 생각이 나서, 생각을 적다가 보니, 어느 날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혼자였다. 마을에는 친구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 나 혼자 긴 밤과 그 많은 생각을 처리해야 했다. 외로웠다. 고립이 뭔지 알았다. 지금도 그런 것들이 두렵지 않다. 고립은 때로 달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다 보니, 내가 사는 마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의 삶과 농부들의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강물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논과 밭이, 산과 강과 나무와 하늘을 나는 새와 바람과 햇살이, 달과 별이, 밤과 낮이, 계절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몸짓이 다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신 개안이었다. 나는 생각의 날개를 달았다.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 그리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산천, 그리고 아이들…. 나는 내가 졸업한 학교와 내 동무들이 살았던 몇 개의 마을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책도 보고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우며 살았다.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자연이 시키는 일을 잘 알고 따랐다. 그들은 삶이 공부였다. 배우면 써먹고, 평생 공부하고, 사는 것이 예술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중요시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이나 아버지의 말이나 동네 사람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었다. 농부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나는 농부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그들이 하는 말을 정리했다. 그게 내 글이 되어주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마을 농부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쓰고 싶었다. 내가 쓴 산문집들은 모두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의 일 이야기들이다. 자연이 하는 말을 따라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았던 농촌 공동체의 원형을 기록했다.
내 글들은 모두 장산리라는 아주 작은 마을의 이야기들이다. 강과 산이 있고, 그 강과 산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 서른다섯 가옥이 이제 열두어 가옥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때 그 시절을 가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가난이 뭔가,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사는 것이 정말 좋아진 것인가.
나는 잠시 마을을 떠나 전주에 살고 있다. 올해 안으로 다시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로 식솔들을 이끌고 이사를 갈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강이 보이고, 내가 심어 가꾼 나무가 보이는 그 마을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시를 미리 썼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이 시를 발표하게 된다. 왠지 나는 지금 서럽다. 이제 나는 버릴 일만 남은 생의 출발점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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