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코빈(66·사진).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대다수 영국 국민들에게조차 낯선 이 이름이 지금 영국 정계에서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오는 14일부터 시작되는 노동당 차기 당수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코빈이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나머지 후보 3명을 멀리 따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급진좌파 시리자 정부가 등장했듯이, 과연 영국에서도 골수 좌파 야당 당수와 총리가 탄생하게 될까.
◇‘반골 중의 반골’의 돌풍 = 영국 정계 안팎은 지금 ‘코빈 돌풍’에 깜짝 놀라고 있다. 지난 6월 초 코빈이 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만 해도, 그가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면서 노동당 당수 직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코빈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코빈은 8선 하원의원이기는 해도, 노동당 내의 비주류인 강경좌파를 대표하는 반골 중의 반골이다. 4명의 후보 중 가장 연장자인데다가 의원경력 30년이 넘지만 역대 노동당 정권이나 그림자 내각에서 각료직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고, 대중적 인지도도 최하위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2개월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보수당 따라하기’에 지친 노동당의 좌파와 젊은 당원들이 3명의 주류 후보들을 외면하고 코빈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7월 29일 데일리메일은 노동당 내 비밀여론조사 결과를 단독입수했다면서, 코빈의 지지율이 42%를 기록했고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노선을 추종하는 이른바 ‘블레어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베트 쿠퍼 의원이 22.6%, 앤디 버넘 의원은 20%, 리즈 켄들 의원이 14%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1차 투표에서 하위 득표자인 버넘과 켄들이 떨어져나가고, 2차 투표에서 코빈이 51%를 득표해 49%를 득표한 쿠퍼를 제치고 노동당의 새로운 당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왜 코빈인가 = 코빈 돌풍은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73) 돌풍과 공통점이 많다. 둘다 후보들 중 최고령이고, 비주류 골수 사회주의자이며 최저 인지도 후보에서 최고 인기 후보로 급부상했고, 소규모 토론회 중심의 풀뿌리 선거전략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물론 코빈은 지지율 1위이고, 샌더스의 지지율은 민주당의 막강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경제정책과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지형을 들여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일명 ‘코비노믹스(Corbynomics)’로 불리는 코빈의 경제정책은 긴축정책 중단, 철도의 재국유화, 부유세의 대폭 인상, 최저임금 인상, 대학 등 고등교육의 무상화,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이 핵심이다. 코빈은 “유권자들에게 분명한 반긴축 노선을 제시하기 위해 경선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민주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샌더스 역시 “대형 은행 해체와 조세제도 개혁 등을 통해 극소수 재벌에 편중돼 있는 부를 중산층과 빈곤층에 재분배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공립대학의 등록금 폐지, 학생 부채 삭감, 일자리 창출을 위한 1조 달러 규모의 공공투자사업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동당과 민주당이 보수 우파 정당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전통적인 지지세력으로부터 외면받았다고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진보 좌파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디언은 지난 5일자 기사에서 코빈이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로 “주류 정치인, 직업 정치인의 식상한 틀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또 “코빈이 전형적인 늙은 좌파, 늙은 마르크시스트지만 경제난과 정치, 사회의 보수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그는 매우 신선한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초비상’노동당, ‘표정관리’ 보수당 = 코빈이 당수로 선출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노동당 주류와 지도부는 패닉상태에 빠져있다. 블레어 전 총리는 “코빈에 흔들리는 심장을 가진 당원은 이식수술을 받아라”며 반코빈 노선을 분명히 했다. ‘제3의 길’을 제시하면서 노동당 13년 정권을 창출했던 블레어는 최근 “전통적인 좌파 공약으로는 승리할 수 없고 낡은 좌파 공약이 승리로 이끌더라도 그런 노선을 택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국민은 낡은 좌파 공약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노동당)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의 ‘로열 패밀리’로 꼽히는 키녹 집안 출신의 닐 키녹 하원의원 역시 최근 옵서버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지금 토론을 이끌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2020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승리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 것”이라면서, 당원들이 비현실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앨런 존슨 전 내무장관은 “당장 (코빈 지지의)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빈 돌풍’을 가장 반기는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당이다. 코빈이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면, 평범한 영국 유권자들이 2020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외면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성향의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금 당장 노동당 당원으로 등록해 코빈에 표를 던져 노동당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자”는 캠페인을 공공연하게 벌이고 있다. 노동당 지도부는 코빈을 당수로 뽑기 위해 최근 강성노조 및 녹색당원들이 대거 노동당에 유입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는 오는 12일까지 당원유권자 등록을 마감한 후 14일 전국 각지에 투표용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원투표는 9월 10일까지 이어지며, 당선자는 9월 14일 특별 당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오애리 선임기자 aer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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