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 허수경 지음 / 난다

한 시인이 23년 전 독일로 떠났다. 시가 아닌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한 유학이었다. 그가 정착한 곳은 독일의 중소도시 뮌스터. 독일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뮌스터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는 도시였다.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 중동지역에서의 고대 도시 발굴 작업, 독일 시집의 탐독, 그리고 걷기…. 책은 저자가 이런 독일 생활에서 길어 낸 사유를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글은 중첩적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뮌스터 이곳저곳을 걸으며 풍부한 감수성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도시의 기억을 꺼내 놓는 게 글을 풀어가는 하나의 가닥이고, 독일 시인의 시를 읽어주며 그 시인의 비장하거나 고통스러운 삶을 따라가는 것이 다른 하나의 가닥이다. 서사와 서정의 두 가닥의 실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대한 두려움,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꼈을 외로움, 그리고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마주쳤을 시간의 덧없음 같은 저자 스스로의 이야기들이 저절로 묻어 나온다. 그의 글을 관통하고 있는 건 공간과 기억이다. 특히 뿌리 뽑혀 부유하는 이들의 삶, 시간의 지층 너머 지나가 버린 생의 덧없음 같은 것들이 저자가 오래 바라보는 것들이다. 이런 시선을 통해 죽음과 인간,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컨대 저자가 두 장의 뮌스터 기차역 사진에 대해 말하는 대목을 보자. 두 사진은 40년의 시간을 간격으로 찍힌 것이다. 그 사이 역사는 새로 수리해서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지만, 저자가 더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역사의 건물과 함께 찍힌 사람들이었다. 사진 속에는 40년이란 시간의 이쪽과 저쪽에서 살다간 사람들이 인화돼 있다. 그게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그저 우연히 그날 역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다. 온기는 휘발해 버린 채 형태로만 남아 사진 속에서 부유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고향 진주역의 옛 역사를 생각한다.

독일 도시 뮌스터를 산책하는 것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실타래가 되니, 책에는 나치 시대의 기억들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의 시선이 머문 곳 중 하나가 파울 불프의 조각상이었다. 파울 불프는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 정신 박약이라는 진찰을 받고 거세를 당했다. 다른 이들보다 느리게 배운다는 이유만으로도 번식이 허용되지 않던 나치 시대였다. 어느 시대에 국가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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