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동쪽과 남쪽 끝자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대덕읍 회진면 진목마을. 이청준 생가 뒤편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길이 그의 소설 ‘눈길’에 등장하는 모자의 아름다운 동행 길이자 어머니의 아픔이 굽이굽이 서린 길이다.
전남 장흥군 동쪽과 남쪽 끝자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대덕읍 회진면 진목마을. 이청준 생가 뒤편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길이 그의 소설 ‘눈길’에 등장하는 모자의 아름다운 동행 길이자 어머니의 아픔이 굽이굽이 서린 길이다.
진목마을 이청준 생가. 어머니는 이미 팔려버린 이 집에서 객지에서 온 아들을 하루 재운다.
진목마을 이청준 생가. 어머니는 이미 팔려버린 이 집에서 객지에서 온 아들을 하루 재운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의 아들은 여름 여행을 겸해 고향을 방문한다. 그러나 겨우 하룻밤을 보내고는 서울행을 재촉한다. 어머니 곁에서 묵는 일이 그에게 그토록 고역인 것은 오두막 단칸방의 불편한 잠자리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은 지붕 개량 사업을 기회로 새집을 짓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소망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으로 괴롭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을 생각하면 부담스럽기만 하다. 부담을 떨쳐버리려 자신은 어머니에게 결코 빚진 게 없다고 되새김질을 해보지만 그럴수록 영문 모를 죄책감은 커져만 간다.

<9> 신샛별이 본 ‘눈길’ 의 전남 장흥

기실 아들은 집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의 근간에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가세가 기울어 오래도록 정붙이고 살아온 집을 팔아야만 했던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도시에서 유학 중인 아들에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잠 한숨을 재우고자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집을 떠나지 않았던 분이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베풀기 위해’ 어머니는 집을 소망해 왔다. 늘그막에 새집을 짓겠다는 어머니의 진심은 자신이 죽은 뒤 찾아올 조문객에게 술 한잔 대접해 보내고 싶은 염치이며 시체를 곁에 두고 잠을 청해야 할 자식들의 처지를 앞서 염려한 배려였던 것이다.

아무리 객지에서 제힘만으로 유학한 아들이었어도 어릴 적 어머니가 집에서 베풀어 준 것까지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아들에게 ‘고향, 어머니, 집’을 떠올리는 것은 도무지 갚을 방도가 없는 빚더미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어머니’와 ‘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 ‘눈길’의 아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서울행을 서두른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고마운 줄도 모른 채 이미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런데 보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새 어머니는 자신의 묘를 쓸 자리를 다음 집터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눈길’의 실제 배경인 전라남도 장흥의 산길을 마주하려면 어떤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눈길’의 주인공처럼 어머니와 소원한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그 산길은 우리 모두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축복인지를 깨닫게 한다. 광주에서 이청준의 생가가 복원돼 있는 장흥의 진목마을까지 100㎞에 가까운 도로를 달리면서, 완만하게 굽은 긴 탯줄을 따라 어머니의 자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흥미롭게도 장흥에 들어서고 나면 ‘어머니 품 같은 장흥’이라는 문구를 자주 만나게 되는데, 군청에서 장흥을 ‘어머니 품’에 비유해 홍보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청준의 소설과 더불어 장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덕분인지 그 비유가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장흥군에서도 남쪽의 끝자락, 동쪽과 남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는 대덕읍 회진면 진목마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언덕의 둘레를 길게 돌아 들어가야 한다. 구릉 지형에 자리한 마을과 마을을 잇는 신작로가 험한 산길을 피해 외곽으로 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없는 ‘눈길’의 산길은 크고 작은 고개들 위를 가로지르며 좁고 가파르게 나 있다. 바람 때문에 돌아간 표지판은 엉뚱한 곳을 ‘눈길’이라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청준 생가 뒤편에 있는 조그마한 산길 입구를 ‘예전 터미널 가던 길’로 옳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눈길’ 속 어머니의 심정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었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되돌아오더구나. 정신이 들어보니 갈 길이 새삼 허망스럽지 않았겄냐. 지금까진 그래도 저하고 나하고 둘이서 함께 헤쳐온 길인데 이참에는 그 길을 늙은 것 혼자서 되돌아서려니……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지야…… 그대로는 암만해도 길을 되돌아설 수가 없어 차부를 찾아 들어갔더니라. 한 식경이나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그제사 동녘 하늘이 훤해져 오더구나…… 그래서 또 혼자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을 서둘러 나섰는데, 그때 일만은 언제까지도 잊힐 수가 없을 것 같구나.”(이청준, ‘눈길’, 문학과지성사, 2012, 165쪽. 이하 같은 책 인용.)



모자가 어두운 새벽의 산길을 서로에게 기대어 걸었다. 그 아름다운 동행의 장면을 이청준은 이렇게 적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가 미끄러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 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163쪽) 터미널로 아들을 배웅하러 간 그 길에서 어머니는 몇 번이고 아들의 손을 놓으려다 만다. 물론 다시 볼 기약이 아득한 아들과 쉽사리 이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자가 걸었을 산길을 어둠 속에서 직접 걷다 보면 홀로 그 길을 걸어 돌아와야 했을 어머니의 두려움과 공포가 먼저 떠오른다.

저녁이 다 돼서 걷기 시작한 ‘눈길’에는 음산한 적막과 시큼한 풀냄새만 있었고, 때때로 낮게 솟아 있는 봉분들과 주인 모를 묘비들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그 길을 의지가지없이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아들이 떠난 터미널에서 날이 밝도록 망연히 앉아 있었던 소설 속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청준의 자전 소설들을 참고하면 그녀는 일찍 남편을 잃고 고된 노동을 하며 자식을 키워온 것 같다. 게다가 (소설 그대로라면) 고약한 술버릇이 있는 큰아들이 집까지 팔아넘겼으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기만 한 그녀는 도저히 혼자서는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의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눈물을 흘리며 다시 길을 걷기로 한다.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르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165쪽)



어쩌면 어머니는 아들을 제 품에서 떠나보내고 쓸쓸히 돌아오는 길에서 서글픈 부모의 숙명을 실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부모는 떠나는 자식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난 뒤에야 오롯한 자기 자신의 삶과 만나게 된다. “몹쓸 늙은 것 혼자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는 아직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홀로 남겨진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을 것이고, 외로웠을 것이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란 그 눈물에 자식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기도를 담는 사람이다.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166쪽)

제대로 된 거처도 없이 살게 된 자신의 궁색한 형편을 걱정하기보다는 아들의 복된 삶을 축원하는 어머니의 눈물로 얼룩진 ‘눈길’은 측량하기 어려운 모정으로 뜨겁다. 고향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하루하루를 분주히 살아내기 바쁜 우리는 이청준의 ‘눈길’을 읽으며 소설 속의 아들처럼 죄스러워진다. 우리 역시 저 한없는 모정에 빚진 바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집을 어머니에게 지어 드린대도 우리는 영영 홀가분해질 수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견뎌내는 와중에도 자식을 향한 기도를 쉬지 않았던 어머니의 숱한 눈물을 먹고 자란 우리는 이제 어머니가 걸어온 인생이 ‘눈물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눈길’은 작가의 체험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 소설에서 어머니의 ‘눈물길’에 얽힌 비화를 묻고 듣는 이는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다. 심지어 아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잠든 척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깨우려는 며느리를 말린다. 말하자면 눈길을 홀로 걷던 당시의 심정을 어머니는 아들이 잠든 틈에 며느리에게만 몰래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청준은 ‘눈길’의 집필 배경을 기록해둔 작가노트에 “‘눈길’은 그러니까 나 혼자 쓴 소설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아내 셋이서 함께 쓴 소설인 셈”이라고 하면서, 아내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고부간이 아니라 이젠 아예 막내딸이나 손주아이처럼 흉허물 없이 채근하고 드는 며느리”로 묘사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가려져 온 그 새벽 헤어짐 이후의 두려운 사연을 당신의 삶 속에 간직해 온 어머니나 그 헌 옷궤의 설운 사연을 실마리 삼아 끝내 그 무고한 아픔의 실체를 드러내준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부인이자 누군가의 어머니로서 살아온 한 여인의 굽이진 인생을 되짚어가기 위한 동행으로서는 그 여인의 삶을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복기할 또 다른 여인이 맞춤했던 것일까. 막내딸이나 손주아이처럼 거듭 질문하는 며느리에게 옛날 이야기하듯 자신의 눈물길을 일러주고 ‘눈길’의 어머니는 조금 덜 외로워졌을까. 산길을 빠져나온 뒤 ‘눈길’의 이정표를 ‘눈물길’로 고쳐 읽으면서, 나는 사십 년 가까이 홀로 아들을 키워 온 또 다른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금도 아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 그녀에게도 몇 갈래의 눈물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들에 대해 나는 아직 충분히 묻고 듣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부러 조금 철없이 굴어야겠다. 너무 늦지 않게 그녀의 눈물길에 동행하기 위해서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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