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8세기 초반 바흐가 성토마스교회 악장으로 봉사하던 독일 작센공국의 러시아 대사였던 카이절링 백작이 자신의 건반악기 연주자 요한 골드베르크를 통해 자신의 불면증을 완화시킬 곡을 써달라고 바흐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이즈음은 피아노로 연주되지만, 당시 대표 건반악기였던 하프시코드 곡으로 바흐가 ‘수면제’로 만든 작품이다. 최근 중국 피아니스트 주샤오메이(朱曉매)의 연주까지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주로 피아노 연주로 되어 있고 하나같이 수면제와는 거리가 멀다. 너무 아름다워 졸다가도 깨어날 곡이다. 혹시 하프시코드 연주는 잠으로 인도할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로절린 투렉의 하프시코드 ‘골드베르크’도 피아노에 익숙한 내 귀에 좀 찰랑대는 감은 있으나 역시 수면제 하고는 거리가 멀다.

예술에는 예술가가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낳은 작품이 의외로 많다. 제작하는 동안 작품 자체의 동력이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운데 가장 잘 짜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고 카뮈가 연극으로 각색하기도 한 ‘악령’을 예로 들어 보자. 그 작품을 쓸 당시 그는 러시아 정교에 귀의했다. 그러곤 도도하게 밀려드는 서유럽의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같은 사상에 대항해 러시아 정교를 통한 러시아 정신을 지키기 위해 이 소설을 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호벤스키를 제외하고 스타브로긴을 비롯한 키릴로프, 샤토프 등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주인공들의 삶을 파고들면 들수록 그들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지게 되어 오히려 그들의 운명적인 삶을 강력하게 기리는 작품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일컫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 그 집안 둘째 아들이며 서구적인 허무주의자 이반이 셋째 아들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이상형으로 내세웠다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정교 사제 알료샤보다 더 실존적인 의미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 다 번역이지만 영어와 한국어로 두 번 정독한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방문자로 갔다가 결핵 환자로 판명돼 그곳에 머물게 된 스위스의 결핵 요양원에는 나중에 나치즘과도 연결될 수 있는 독일인 관념론자 나프타와 이탈리아인 휴머니스트 제템브리니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둘은 서로 이념이 달라 내내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나프타가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잠깐, 허리께서 손을 나불대다 상대방보다 먼저 총을 꺼내 쏘는 서부영화 결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유럽식 권총 결투 규칙을 조금 이야기하자. 심판자와 결투 당사자의 후견인 둘, 이렇게 셋이 미리 모여 결투 날짜와 시간, 총기 그리고 사격 거리, 탄환수 등 결투 규칙을 정한다. 거기엔 결투 신청받은 자가 먼저 한 발 쏘고 다음에 신청한 자가 한 발, 다음엔 또 신청받은 자가 한 발, 이런 식으로 쏘는 원칙이 전제된다. 정해진 탄환을 다 쏘아도 어느 쪽도 치명상을 입지 않으면 신의 뜻이라며 그냥 헤어지게 돼 있다.

이념적으로 토마스 만은 휴머니스트 제템브리니 편이었고, 작가의 분신이랄 수 있는 카스토르프는 그의 후견인이 된다. 결투장에 오르며 제템브리니는 카스토르프에게 자신은 인간을 겨냥해 총을 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투 신청을 받은 그가 먼저 쏠 차례가 되자 총구를 하늘에 대고 발사한다. 그것을 본 나프타는 잠시 상대방을 쳐다보다가 상대방의 흉내를 내어 하늘을 향해 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을 향해 쏜 자를 겨냥해 쏠 수도 없다고 하고 자신의 몸을 겨눠 총을 쏜다. 비록 자기와 다른 이념을 가진 주인공이지만 토마스 만은 자신과 이념이 가까운 인물을 능가하는 박력 있는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사탄의 유혹으로 낙원을 잃은 아담과 이브를 통해 사탄을 매도하여 신의 길을 보여주려고 한 존 밀턴의 ‘실낙원’도 작품 속에서 가장 살아 있는 인물은 악한 천사 사탄이다. 그에 비하면 선한 천사들은 말할 것 없고 주인공 예수도 매력이 경감된다. 사탄 속에서 인간의 깊은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뿐이랴. 교황으로부터 예수 재림을 알리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정면 벽화로 그리라는 명을 받은 미켈란젤로, 그가 그린 벽화 한가운데서 손을 번쩍 들어 심판하려는 예수도 우리의 눈을 끌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존재들은 악기를 타며 하늘에 오르는 무리나 지옥에 떨어진 무리가 아니라 예수 앞에 빙 둘러서 있는 인간들이다. 재림하면 예수의 오른편에서 천 년의 영화를 누리도록 돼 있는 순교한 제자들. 주로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으나 그 가운데는 피부를 벗기는 형을 받고 순교하여 제 껍질을 들고 서 있는 바돌로메도 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예수보다도 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최후의 심판에 관심이 없거나 어떻게 보면 심판을 거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절대 고통 속에서 순교한 그들에게 천년 왕국에서의 영광 같은 것은 관심 밖이다. 미켈란젤로는 예수의 최후의 심판 한가운데에 인간의 존엄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졸시 ‘즐거운 편지’도 영화 ‘편지’에서처럼 ‘슬픈 편지’가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새로 구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정신 바싹 차리고 문화일보에 보낼 산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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