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 논설위원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이후 불과 7개월 뒤인 1924년 4월. 일본 극작가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는 ‘연극신조’라는 잡지에 ‘해골의 무도’라는 희곡을 발표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구호반원: 조선인이 대거 사단으로 밀려들어 온다는 소문입니다./ 피난자1: 역시 조선인이 쳐들어온다./ 피난자2: 조선인은 우리들의 적이다.”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경찰과 계엄군이 퍼트린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전파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담았다. 대형 파괴의 원인을 조선인에게 전가한 일본인들의 집단 광기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잡지는 발매금지됐다. 내일(9월 1일)은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지 92년째 되는 날이다.

최근 과격한 혐한(嫌韓) 시위대는 재일 한인(韓人)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조센징을 죽이자’ ‘코리아타운을 불태우자’고 위협을 가했다. 재일교포를 겨냥한 이들의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혐오 발언)는 간토대지진 때의 악성 루머와 오버랩된다. 헤이트 스피치 피해자 중 일부는 우울증세로 정신과 진료까지 받고 있다. 때마침 일본 야당이 발의한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안을 놓고 이달 중 일본 의회 심의가 이뤄졌다. 자민당의 미온적 태도로 봐서는 법안 통과가 불투명하다. 실제로 자민당과 공명당 등 일본 여당은 올해 정기 국회에서 이 법안 통과를 보류하기로 했다.

물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의 황당한 역사 왜곡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도 한·미·일 공조와 경제분야 등 협력할 분야는 협력하는 투 트랙 전략을 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 70주년을 맞이하고도,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면서 침략 역사를 슬그머니 덮고 가려고 하는 행태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간토 대학살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일어났으며 유언비어만 믿고 조선인 6600명 이상을 집단학살한 잔인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언론도 유언비어 유포에 가담했다. 피해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법적·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일본 정부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보상은커녕 명예회복조차 거론하지 않은 채 9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더욱이 헤이트 스피치는 일본 사회 자체를 불구로 만들고 있다. 일본이 과연 2020년 평화 정신을 상징하는 도쿄(東京)올림픽을 개최하고, 내년에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나라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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