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체험·학습
‘고부 갈등’ 등 아픔 함께 나누기도
마지막날엔 다함께 韓食 만들기
지글지글 끓는 불판 위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고소한 불고기 내음이 침샘을 자극한다. ‘꿀꺽’ 침을 삼키다 참지 못한 한정길(48) 씨가 젓가락을 들자, 바로 옆에 ‘찰싹’ 붙어있던 아내 량하이옌(梁海燕·32) 씨가 손등을 때리며 제지하고 나선다. “빨리 채소나 썰어 놓으세요!” 머쓱해진 한 씨가 다시 도마 위의 칼을 잡는다. “결혼 10년이 넘도록 칼 한 번 안 잡아본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아내의 말에 한 씨가 반박하려고 고개를 돌려 보지만 아내의 매서운(?) 눈길에 금방 고개를 떨군다. 좀 억울하긴 하지만 오랜만에 큰소리 치는 아내가 그리 보기 싫지만은 않다. “자, 알았응께. 입 다물고 맛이나 보더라고.아~아.”
한 씨가 아내에게 오삼불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주고 자기도 냉큼 한 점을 집어든다. “역시, 이게 우리 맛이라니까!”
지난 8월 21일 오전 11시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인근의 라니요리교실. 맛있는 음식 냄새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이날만큼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요리 실습실을 더욱 구수하게 채웠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사랑지도자연수원이 진행하는 ‘다문화가정 농촌정착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북 진안군 백운농협과 전남 영암군 농정지원단 관내 농협 70여 명의 다문화가정 가족들이 모여 요리 실습이 한창이다.
농식품부의 지원을 받아 연수원은 지난 2009년부터 ‘다문화가정 농촌정착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흔히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는 그동안 총 6955명의 다문화 가족이 참여했다. 지난 19일부터 시작된 이번 일정이 올해 8번째 진행되는 것이다.
연수원은 올해만 총 980여 명의 다문화 가족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 이국의 신랑, 신부들에게 우리 한국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체험하도록 해주는 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8월 21일 진행된 한식(韓食) 요리 체험은 농협중앙회의 ‘식(食)사랑 농(農)사랑 운동’ 정신을 체득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시간이다.
본래 ‘식구(食口)’란 한솥밥, 같은 밥을 먹는 이들이란 의미다. 연수 첫날 다문화 생활법률 특강, 농어촌 다문화 가족 지원정책 소개, 가족단합 프로그램, 아내와 남편에게 사랑의 편지쓰기 등 다문화가정의 가족애를 더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튿날 63빌딩 등 서울 문화 탐방 등 관광을 마친 뒤 일정 마지막 날에 온 가족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가족애를 다지도록 꾸며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한식을 통해 다시 한 번 모두가 한국의 한가족임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당일 가족들이 손 모아 만든 오삼불고기 한 점, 잡채 한 접시, 오이소박이 한 점 한 점은 그냥 음식이 아니었다. 사랑으로 빚어낸 마음 한 조각, 한 조각이었다.
처음 소개한 한 씨 부부는 올해 결혼 11년 차 다문화가정이다. 별칭 ‘중국댁’인 한 씨의 아내 량 씨는 말이 없으면 누가 봐도 전형적인 한국 농촌 아줌마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남편을 눈짓 하나로 제압하는 게 농촌 아줌마 실력(?)이 여실히 느껴진다.
지난 2004년 중국을 떠나 남편과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생활해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들, 딸 합쳐 아이만 셋이다. 그러나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세월 동안 어찌 즐거운 일만 있었을까. 한국 며느리라면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것, 한국에 가족이 있는 며느리들도 부엌에 숨어서 눈물을 훔쳐야 한다는 고부 갈등까지 중국댁 량 씨는 오직 남편 한 씨만 바라보며 견뎌야 했다.
“첫날 프로그램 중에 한국 시집살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가족문화를 소개하면서 고부 갈등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정말 많은 이들이 호응했습니다. 모두 한국에 시집와서 가장 힘든 게 고부 갈등이었다고 한목소리를 냈지요. 몇몇은 자신의 사례를 소개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연수원의 남기정 교수의 말이다. 남 교수는 “아이들만 해도 처음엔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한 가족들은 일정 동안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고 다른 다문화가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실제 일정 동안 친해진 덕인지 아이들은 서너 살짜리부터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연령대가 다양했지만 서로 챙기고 아끼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한강 유람선을 타고, 63빌딩의 수족관을 보면서 마음이 급한 어린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먼저 보려고 나서면 언니 오빠들이 나서 양보하며 친동생인 양 챙겼다고 남 교수가 전했다.
8월 21일 이날 어른들이 오삼불고기 등으로 점심상을 차리는 동안 아이들은 후식 과자를 만들었다. 노란 달걀을 밀가루와 버무리며 쿠키를 만드는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실습실을 따로 썼지만, 남 교수의 말처럼 아이들은 언니 오빠들을 따라 선생님의 요리 강습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집중했다.
“한쪽 방향으로 잘 저어야지!” 올해 7살 난 김종찬에게 8살짜리 누나 박수진이 한 소리 한다. 둘은 백운면 이웃 마을에 살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다. 수진이는 엄마를 닮아 눈이 유달리 커서 귀엽다. 낯선 기자의 질문에 종찬이가 쭈뼛거리면 바로 수진이가 나서서 대신 답을 한다.
“쿠키 만들면 누구에게 줄 거야? 엄마야, 아빠야?” 전형적으로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종찬이에게 던지니, 역시 수진이가 나서 답한다.
“우리 다 함께 먹을 거예요.” 얼굴만큼 수진이의 마음도 예쁘다. 어느새 실습실에 과자의 고소한 내음이 가득해졌다. 마치 70여 다문화 가족의 사랑도 따라 익어가는 듯했다.
박선호 기자 shpark@munhwa.com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