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1947년쯤 야산 이달(왼쪽에서 두 번째)이 주역을 가르치던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선 뒤 찍은 기념사진. 야산의 유일한 사진이다.
해방 이후 1947년쯤 야산 이달(왼쪽에서 두 번째)이 주역을 가르치던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선 뒤 찍은 기념사진. 야산의 유일한 사진이다.
아버지 야산 이달은야산(也山·1889~1958)은 근대 주역의 대가로 꼽힌다. 일부 김항(一夫 金恒·1826∼1898)과 함께 이 분야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야산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집약한 게, 일제 강점기와 해방 및 6·25전쟁의 격변기를 살면서 ‘주역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간 인물’이란 것이다. 야산은 혼란의 시기에 유랑하며 ‘야산역학(也山易學)’을 독학으로 정립했을 뿐더러, 자신이 공부한 것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공동노동·공동분배의 사상을 갖고 공동체를 만들어 실험한 게 그것이다. 언뜻 사회주의 노선으로 볼 수 있지만 그와는 거리가 있다. 이이화는 “야산은 제자를 받을 때 좌·우건 독립운동 혹은 친일을 했건 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이화는 야산의 사상 중에 주역의 ‘후천개벽’, 즉 혁명적 사상에 방점을 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이화에 따르면, 유랑에서 돌아온 야산은 호적의 이름 ‘순영’을 달(達)로 고쳤고, 자호는 ‘다른 사람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고 나서 막차를 탄다’는 뜻의 야산(也山)이라 했다. 여기서 ‘산(山)’은 주역의 동방, 곧 우리나라를 뜻했다. 야산은 많은 일화가 따라붙었다. 혼자 김천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가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든지, 6·25를 예언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산은 대구에서 요즘으로 치면 증권선물거래인 기미(期米·미두)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는데, 주역을 통달해 기미를 잘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제자가 많이 모였다. 하지만 야산은 기미로 번 돈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衡平運動·백정의 계급적, 민족적 해방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29년 기미로 번 돈 29만 원을 가지고 20여 가구를 이끌고 철원군으로 들어가 집단농장을 세워 공동노동·공동분배 방식으로 운영했으나 5년 만에 실패해 접었다. 사람들이 사욕(私慾)을 제어하지 못해서였는데, 야산은 ‘실험일 뿐’이라며 괘념치 않았다.

이이화의 형제 중엔 셋째 형인 간화(艮和)가 부친에게 주역을 공부했고, 그 부인인 김함장이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수학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조카 중에 셋째 형의 자제인 응국(應國)과 응문(應文)이 가학(家學)의 맥을 잇고 있다. 야산의 제자 중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대산 김석진(87)은 야산 주역의 맥을 잇는 동방문화진흥회를 만들었다.

이이화는 “동방문화진흥회의 대전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조카 응국이 올 연말쯤 처음으로 ‘야산 전기(傳記)’를 펴낼 것”이라고 전했다. ‘전설’로 떠돌던 야산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제대로 정리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부친의 전기를 써볼 생각은 안했나’라고 묻자 이이화는 가볍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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