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 청죽(淸竹)부터 바람을 맞는 풍죽(風竹), 빗속의 우죽(雨竹)과 눈 쌓인 설죽(雪竹)까지. 서울 강남 고층빌딩가 전시장에 대나무숲이 들어섰다. 맑은 바람과 높은 절개를 뜻하는 ‘청풍고절(淸風高節)’의 대나무가 불쑥 솟아, 비에 젖어 구부러지고 바람에 휘날리거나 흰 눈을 안고 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포스코센터 지하 1층, 포스코미술관의 개관 20주년 기념전(10월 6일까지)이 문봉선(54) 씨의 묵죽화전이다. 전통의 한지 먹그림을 접하기 힘든 시대지만, 도심 속 전시공간의 회색 벽 위로 사군자 중 대나무 그림들의 조화가 절묘하다. 입구에 흑백추상화 같은 묵직한 돌 그림이 시선을 끄는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온통 대나무 그림이다. 바람에 춤추듯 일렁이는 대숲을 끝이 뾰족한 모필과 벼루에 직접 간 검은 먹으로 표현한 가로 10m의 풍죽도(사진)가 걸린 안쪽 전시장은 방석에 편히 앉아 오디오로 대숲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명상의 공간이다.

비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중첩된 우죽도는 흩뿌리는 빗줄기와 희뿌연 대숲의 운무까지 담고 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우죽의 양태와 비 내리는 대숲의 정취를 담아낸 ‘우죽’이야말로 옛것을 새롭게 되살린 ‘창신(創新)의 압권’으로 지목한다. 눈의 차가운 흰 빛을 표현하기 위해 쌀가루를 아교에 섞어 한지에 바른 후 그린 설죽은 이파리의 눈이 반쯤 떨어져 있다.

현무암과 죽림이 병풍처럼 펼쳐진 제주 바닷가마을에서 나고 자란 화가는 ‘자연과 닮은 묵죽화’를 추구한다. 마음속에 온전한 대나무가 이뤄져야 한다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을 위해 섬진강 구례, 하동 대밭 등 전국 대숲을 관찰하고 사생했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댓잎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30년 전 인사동 중국책방에서 구한 중국 청나라 묵죽화가 정판교의 서화예술론을 포함해 옛 기법과 대가의 작품 및 화론을 비교 분석했다. “스승 없이 창호지와 벽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보고 그림을 배웠다”는 정판교의 글을 되새겼다. 눈과 마음으로 익숙한 대나무의 생태에 자신의 의지를 담는 대나무 그림을 지향했다. 전통화 침체기에 오히려 수묵화에 몰입해 그는 2000년쯤 4년여 중국 남경예술학원에서 중국 역대 묵죽화의 근원을 살폈다. 밑그림 없이 해서의 가로획 ‘일(一)’을 밑에서 위로 긋는 줄기를 시작으로 가지·마디·잎의 순으로 대나무와 묵연(墨緣)을 이어왔다 .

홍익대 앞 자택에서 안산으로 매일 새벽 등산 후 서예로 하루를 시작하는 문 씨는 대나무 그림 외에 20년여 동양화의 조형양식과 예술철학이 집약된 사군자를 그려왔다. 서예 전각을 익히며 2007년 사군자전을 시작으로 2011∼2012년 각기 매화·난 그림전을 열었다. 전통에 충실한 사군자그림이나 실경산수화와 별도로 검은 먹과 흰 여백이 어우러지는 무채색 추상화 같은 특유의 회색 풍경화를 통해 수묵 실험, 전통서예를 바탕으로 한국화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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