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역행그림, 2015, 세부, 캔버스 위에 유화. 작가가 전생을 여행하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구해준 소녀들 그림.
최면전문가 찾았다 예술적 영감 “전생 그리며 억압풀어지는 기쁨… 거슬러 올라가 만난 장면 생생해 그림으로 치면 수백만장 넘을 것”
전시장에 들어서면, 숲 한가운데 사방이 트인 습지에 둥실 떠 있는 커다란 유리구슬과 그 위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 먼저 눈길을 끈다. 어두컴컴한 실내조명 때문인지 태곳적 어느 시대를 연상시키는 그 장면은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현대미술작가 이수경(사진)이 ‘믿음의 번식’이라는 주제로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의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지난 18일부터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수경 작가는 도자 조각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도자기 파편들을 조합해 에폭시로 이어 붙이고 이음매에 금박을 칠한 이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 연작 시리즈물은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도 대부분 미술애호가는 도자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은 일순 당황한다. 그 같은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기 때문이다. 대신 꿈에서 본 장면을 그린 듯한 회화작품들과 함께 3D 프린터 작업으로 태어난 조각 작품들 그리고 영상작업물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게다가 회화작품에는 ‘전생역행그림’이라는 제목까지 붙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관련 책들을 읽으며 궁금증을 갖게 됐어요. 우주에 빅뱅이 일어나서 초신성이 폭발하며 우주가 만들어졌고, 우리는 초신성이 폭발했을 때 먼지를 공유하고 있잖아요. 우주가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전생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또 전생은 동양적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심리학 박사님으로 최면과 전생 문제의 전문가이신 엄영문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림의 새로운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작가의 ‘전생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다. 이 작가는 지난해 1월부터 매달 엄 박사를 찾아갔고, 그렇게 해서 떠오른 전생의 이미지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번 전시회에 내걸린 ‘전생역행그림’들도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저 그림 속의 노인분도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 만난 분이에요. 동물의 사체들이 흩어져 있고, 냄새도 지독했어요. 그리고 한가운데 투명한 유리구슬 위에 저분이 앉아 계셨지요. 그분 말씀이 더러운 것에서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것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림 속 노인으로부터 예술적 영감까지 얻었다는 얘기다. 전시된 ‘전생역행그림’으로는 수십 명의 소녀가 흰 얼굴에 하얀 스카프까지 머리에 두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그려놓은 것도 있다. 이 작가는 소녀들에 대해 “다른 생으로 넘어갈 때마다 물에 빠졌고 그때마다 나타나 나를 구해준 소녀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생역행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여러 억압이 풀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며 기쁨을 느끼게 됐습니다. 화단에서 나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전생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강렬한 이미지들과 마주쳤고, 그때 본 광경이나 사람들을 다 그리려면 죽을 때까지도 다 못 그릴 것 같아요. 전생에서 만난 장면들을 그림으로 치면 수백만 장도 넘을 거예요. 너무 생생해요. 제게는 진짜 큰 자산입니다.”
전시장에서는 3D 프린터로 제작된 ‘모두 잠든’ 연작 시리즈도 만날 수 있다. 바리공주, 서왕모, 타라와 같은 민담이나 신화 속 인물들이 고단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깜빡 잠든 순간을 포착한 조각 작품이다. 또 영상물 ‘하얀 그림자’는 작가가 대만 타이난(臺南)과 일본 니가타(新潟), 전남 강진에서 열린 전통 행사를 방문해 촬영한 영상 작업이다. 축제의 들뜬 분위기 한편에서 자신만의 음악과 춤에 몰입한 채 보일듯 말듯 스쳐지나가는 이 작가를 비추며 카메라의 시선이 이동한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02-3015-3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