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근 / 한양대 교수·법학

대형 마트에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김일곤은 28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지니고 있었다. 김일곤은 ‘자신이 사실은 피해자인데 ○○○ 때문에 가해자로 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적어 놓았다’고 했다.김일곤이 전과 22범이고, 심지어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는 분석도 나오고, 대형 마트 주차장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모두 옳은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법률가들이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신이 억울하게 피해자가 됐다는 김일곤의 주장이다. 물론 그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형사 실무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가끔 학생들이 자신은 싸움을 말렸을 뿐인데 폭행범으로 몰렸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오는 일이 있었다. 싸움의 상대방은 여러 사람이 자신을 폭행했다고 해야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싸움을 말린 사람도 자신을 때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을 반박할 뾰족한 방법이 없어 이른바 ‘쌍피사건’(쌍방 모두가 범죄피의자가 되는 사건)으로 처리돼 억울하게 처벌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김일곤의 22번의 전과도 자신을 억울하게 가해자로 만든 우리의 형사사법 또는 우리 사회에 대한 반감이나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형사사법 제도나 형사사법 종사자들이 그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시켰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독일어로 ‘형사사법(Strafrechtspflege)’이란 말에는 ‘형사사법 서비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즉, 형사사법 기관은 권력 기관이 아니라 서비스 기관이라는 것이다. 형사사법의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공평한 서비스를 받지 않을까 가장 염려한다. 설사 범죄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형사사법 제도와 사회에 반감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형사사법의 목표인 정의는 평등이라는 개념과 가장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요즘 고검장과 지검장 출신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지 않고 변호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변호사 선임계의 제출은 전관예우(前官禮遇)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데,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은 것은 전관예우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고검장 출신의 변호사는 필자도 잘 알고 있다. 그를 볼 때마다 매우 합리적이고 청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일이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고 싶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집단에 함몰되면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판단을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 어느 때부턴가 합리적인 근거 없이 고액의 수임료를 받는 것이나 전관예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인들은 전관예우를 부정하지만 국민은 이를 믿지 못한다.

형사사법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전관예우를 없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관을 없애는 것이다. 평생검사, 평생법관 제도를 확립하고, 일정 기간 이상 판·검사로 근무한 사람은 변호사 개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판사의 독립성은 보장돼 있고, 검사는 독임제 관청이다. 판·검사 출신 교수들 말로는 보수도 교수보다는 많다고 한다. 정년도 65세, 63세로 다른 공무원에 비해 길다. 물론 연금도 보장돼 있다. 모두 평생 종사할 만한 직업이다. 승진이나 금전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포기해선 안 될 귀한 직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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