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 김훈 지음 / 문학동네
소설가 김훈(67·사진)의 글에서는 노동의 냄새가 난다. 몸으로 부딪쳐 삶의 방식을 체득한 거친 남정네의 모습이다. 쓰는 방식도 여전히 육필을 고집한다. 그는 스스로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고 고백하지만, 결코 그냥 놀지 않는다. 발로 또 자전거로 길을 누비고, 멈춰선 곳에서는 힘껏 관찰하고 만지며, 집에 돌아와서는 골똘히 생각하고 문장을 벼린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관념적이지 않다. 치열한 삶의 순간순간 고개를 드는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듯하다. 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도 그렇다. 노동하듯 잘 노는 이 중년 남성은 동해, 서해, 남태평양, 압록강, 중국 단동(丹東) 등을 돌아다니며 먹고사는 풍경을 담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단문’으로 쳐내려 가는 소설과 달리, 이야기꾼처럼 뽑아내는 문장들은 다른 맛의 매력이 있으며, 이 또한 명문이다. 여자, 돈, 손, 발, 고향에 대해 쓴 연작 산문에서는 자유자재로 생각을 확장하는 그의 능력을 만난다.
‘밥’ ‘돈’ ‘몸’ ‘길’ ‘글’ 등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된 책에서 특히 눈이 가는 부분은 ‘밥’이다. 유독 먹는 행위에 관심이 많은 작가의 모습이 잘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범상치 않은 제목의 표제작은 매년 36억 개, 1인당 74.1개의 라면을 먹으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삶을 기록한다. 삼겹살을 시작으로 김밥, 짜장면, 짬뽕을 아우르고 라면에 도착해서는 역사, 가격, 맛, 의미, 맛있게 끓이는 방법까지를 두루 살핀다. 라면 하나로 이만큼의 얘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김훈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라면 시장의 팽창은 그 무렵 구조적으로 전개된 빈부의 양극화, 인구의 대량소외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값싼 라면은 주로 서민층에 의해 향유됐고, 함께 모여 먹기보다 혼자 먹는 성격이 강하다. 공업화, 대량화의 상징으로 똑같은 생산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라면의 존재방식은 36억 개, 개별이다. 라면을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운 일이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쓸쓸해하는 나의 존재가 내 앞에서 라면을 먹는 사내를 쓸쓸하게 해주었을 일을 생각하면 더욱 쓸쓸하다. (중략) 이 궁상맞음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도 다 마찬가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거리에서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하다.”(‘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돈’이 권력이 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관련, “이 나라의 돈은 화폐라기보다는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DON’으로 표기해야만 그 유일신다운 전능의 위상에 합당할 것”이라며 “세월호를 침몰시킨 70년에 가까운 적폐는 이 ‘DON’과 거기에 붙좇는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연합세력이라는 사실의 흐린 윤곽은 이미 드러나 있다”고 일갈한다. 아들을 청자로 내세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돈의 가치를 알되, 그 앞에 정직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돈1’ 중에서)
책은 그가 앞서 발표한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2002) ‘밥벌이의 지겨움’(2003) ‘바다의 기별’(2008)에 실린 글의 일부와 새로 쓴 원고 400장(200자 원고지)을 합쳐 내놓은 것이다. 그는 ‘일러두기’에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고 썼다. 책들은 현재 절판돼 중고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애써 다듬어 세상에 내놓은 글을 과감히 버리는 것, 그 또한 ‘김훈’스럽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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