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 편집국 부국장

“오랜 기간 지속된 저금리 환경 탓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좀비기업들이 실물 경제를 배회하고 있다…(중략) 노쇠하고 병든 기업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기 위한 지원과 투자도 계속되고 있다….”

‘채권왕’으로 유명한 미국 야누스캐피털의 빌 그로스가 최근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글로벌 초저금리 정책이 7년째 이어지면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융 지원에 의지해 초저금리로 연명하면서 퇴출을 피하고 있는 좀비기업의 급증이다. 특히 미국의 0%대 기준금리가 인상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각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초저금리에 기대 목숨을 부지하며 급증했던 한계기업들이 금리인상의 유탄을 맞고 한꺼번에 무너질 경우 기업 부실이 금융기관 부실로 연결되면서 자칫 시스템 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금융감독 당국이 한계기업들에 대한 선제적인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위기감의 반영으로 보인다. ‘중소기업 지원=선(善)’으로 인식돼온 한국적 금융 관행에서 감독 당국이 한계기업들에 대한 선제적 구조조정을 독려하고 나섰다는 건 중요한 정책 변화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내후년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빅이벤트를 앞두고 정부와 감독 당국이 한계기업 퇴출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시적인 실업자 증가 등 ‘출혈’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신속한 한계기업 퇴출과 더불어 놓쳐선 안 되는 게 기업들의 자발적이고 원활한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을 유도할 수 있는 정책적·법적 지원책 마련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 이미 각국은 저마다 자국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 지원 경쟁에 나선 상태다. 국유기업들의 총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의 80%에 육박하는 중국은 과잉 경제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국유기업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올인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5만여 개에 달하는 국유기업 중 한계기업은 과감히 퇴출시키고 중앙에서 관리하는 110개 국유기업도 과감한 합병을 통해 2020년까지 40개의 초대형 기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40개로 통폐합된 중국의 거대 국유기업 출현은 중국 내수시장은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에 쓰나미급 충격을 가해올 게 분명하다. 일본은 기업의 자발적인 사업 재편에 대해 각종 법 절차적 특례를 보장하고, 세제 혜택과 금융지원까지 제공하는 산업경쟁력강화법(일명 원샷법)을 지난해부터 시행해 일본 주력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 소니가 수익이 저조한 PC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흑자 전환을 눈앞에 둔 것이나, 미쓰비시중공업이 지난해 항공기 엔진 부품 사업 부문을 분할해 합작법인으로 덩치를 키워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도 원샷법을 통한 과감한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뛰는데 정작 한국에선 말만 요란할 뿐 제자리다. 일본 원샷법을 벤치마킹해 5년간 한시적으로 기업의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을 지원하는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이 지난 7월 발의됐지만 석 달 동안 관련 국회 상임위원회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야당 측이 ‘대기업 퍼주기’ 법안이라며 결사저지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 사업 재편에 더 긴요한 법안”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철옹성 같은 ‘반(反) 대기업’ 프레임에 갇힌 새정치민주연합 측에는 마이동풍이다. 초읽기에 들어간 미국 기준금리 인상은 향후 한국경제 전반에 간단치 않은 충격파를 던질 것이다.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또 당한다. 한계기업의 과감한 퇴출과 더불어 기업들의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은 한국경제에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 엄중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선 국회 선진화법을 등에 업은 야당의 ‘윤허’가 필요하다. 진영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사회에선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경제에 또다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자칫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한국경제가 한없이 망가지고 국민의 경제 고통이 극에 달하는 걸 꼭 봐야겠다는 심산이 아니라면, 한국판 원샷법 제정에 대해 새정치연합 측에서도 전향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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