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말 위에서는 천하를 얻을 수 있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可以馬上得天下 不可以馬上治天下)는 경구(警句)가 있다.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한 한(漢) 고조에게 신하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집권전략과 통치전략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지 32개월이 가까워지면서 이젠 하나둘 성과를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집권 전반기에는 “앞으로 잘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컸다면, 후반기에는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것이 민심이다. 목함 지뢰 사태에 이은 8·25 남북 합의 이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해 40%대를 유지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정권의 성적표는 아니다. 역사가 박 대통령의 시기에 무엇을 이뤄냈는지 현미경을 들이댈 중요한 시기가 지금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가 올 초부터 선거가 없는 올해를 ‘개혁의 골든타임’이라면서 노동·교육·금융·공공 등 4대 개혁에 올인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집권 후반기 시작과 함께 박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런 목표를 이룰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박 대통령이 목표로 제시한 4대 개혁은 모두 손해 보는 집단의 저항이 간단치 않아 하나만 잘해도 성공한 정권이라고 할 정도로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지금 대한민국을 바꾸는 데 절실하고 필수적인 개혁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건강보험 개혁 하나를 완수하기 위해 몇 년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을 보면 어느 나라든 개혁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수석비서관회의, 각종 연설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4대 개혁을 강조하고 독려했다. 첫 번째로 칼을 뽑아든 공무원연금개혁은 국회에 넘겨 여야 협상으로 타협을 봤지만 개혁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다.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국민의 힘을 모아 국회와 공무원을 압박해야 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저 국회에 공을 떠넘기고 지켜만 봤다. 오히려 공무원연금법 처리와 연계해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됐다.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곁가지가 주인공이 돼 버렸다.

두 번째로 칼을 뽑아든 노동개혁은 추석 연휴가 지나면서 정치권의 관심을 잃어버렸다. 여야 대표가 추석 연휴에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도’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직접 나서 정면 반대하는 바람에 당·청 갈등이 노동개혁을 덮어 버렸다.

공무원연금개혁 때는 원내대표, 노동개혁 때는 당 대표가 청와대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시작부터 어긋나 버린 것이다. 청와대가 직접 당과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면서 개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여당도 ‘공천 룰’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개혁입법은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 와중에 여권은 현재 검인정(檢認定) 체제인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국정(國定)으로 바꾸는 또 다른 핵심 어젠다를 들고나왔다. 개혁에는 반대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역사학계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면 국정의 동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역사교과서 편향은 바로잡아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지만, 여권이 감당해낼 수 있을지가 문제다. 큰 개혁을 마무리 짓지도 않고 또 다른 주제를 던지면 국민은 어지러울 따름이다. 지지부진하던 야당은 모처럼 단합된 모습으로 대여(對與) 투쟁에 나서고 있다.

내년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총선 이후에는 대선 국면에 들어가는 만큼 청와대의 정책 추진 동력은 더 떨어지고 야당의 저항도 거세질 것이다. 대통령도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말에서 내려와 직접 부딪쳐야 한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이 정상이라면 공천 룰을 가지고 싸움을 벌일 게 아니라 선거에 참패하는 한이 있어도 4대 개혁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년 선거에 ‘박근혜 키즈’를 많이 공천한다고 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선 후보로 띄운다고 해서 국가 대개조가 이뤄지지 않는다. 지금 최고의 선거전략이자 통치전략은 국민이 지겨울 정도로 일관되게 개혁 정책을 설득하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 대통령은 더 이상 ‘선거의 여왕’이 돼선 안 된다.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개혁의 여왕’이 돼야 한다.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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