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황금의 비’(1982).
천경자 화백 ‘황금의 비’(1982).
“딸이 유골함 들고 서울시립미술관 다녀가”김홍희 미술관장 “알리지 말아달라 부탁”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절필 선언
1998년 작품 93점 미술관 기증뒤 미국行
뉴욕 큰딸 집 머무르며 외부와 접촉 끊어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


외부와 인연을 끊고 미국 뉴욕에 칩거, 생사 의혹이 제기돼 오던 천경자(사진) 화백이 두 달 전 미국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전시 보관 중인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천 화백의 딸 이혜선(70)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 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며 “당시 이 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21일 천경자 화백의 딸 이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지난 2003년 7월 2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지난 8월 6일 새벽에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전했으나 유골이 안치된 장소에 대해선 함구했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 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 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난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 씨 집에 머물러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42년과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에서 연이어 입선 후 화단에 들어선 천화백은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우글우글한 뱀 그림 ‘생태(生態)’를 발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천 화백은 작품활동을 하며 여러 차례 남미 등지로 해외여행을 하고 꽃과 여인을 소재로 원시적이면서도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화단의 스타 작가로 승승장구하던 중 1991년 천 화백에게 인생 최대의 시련을 안겨 주었던 ‘미인도’ 위작논란이 일며 절필을 선언,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스케치 93점 기증한 후 천 화백은 딸 이씨가 거주하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천 화백의 작품은 1940~1990년대까지 작품인데, 일본 유학시절 작품부터 자화상, 다양한 인물화, 외국여행을 통해 그린 풍물화와 드로잉 등이다. 한편 천 화백은 슬하에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 씨다. 천 화백은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1924년 전남 고흥 출생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 이때부터 ‘경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함 △19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1954년 홍익대 미술대 동양화과 교수 △1961년 국전 추천 작가 △1973년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198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절필 선언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실’ 개관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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