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절필 선언
1998년 작품 93점 미술관 기증뒤 미국行
뉴욕 큰딸 집 머무르며 외부와 접촉 끊어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
외부와 인연을 끊고 미국 뉴욕에 칩거, 생사 의혹이 제기돼 오던 천경자(사진) 화백이 두 달 전 미국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전시 보관 중인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천 화백의 딸 이혜선(70)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 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며 “당시 이 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21일 천경자 화백의 딸 이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지난 2003년 7월 2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지난 8월 6일 새벽에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전했으나 유골이 안치된 장소에 대해선 함구했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 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 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난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 씨 집에 머물러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42년과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에서 연이어 입선 후 화단에 들어선 천화백은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우글우글한 뱀 그림 ‘생태(生態)’를 발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천 화백은 작품활동을 하며 여러 차례 남미 등지로 해외여행을 하고 꽃과 여인을 소재로 원시적이면서도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화단의 스타 작가로 승승장구하던 중 1991년 천 화백에게 인생 최대의 시련을 안겨 주었던 ‘미인도’ 위작논란이 일며 절필을 선언,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스케치 93점 기증한 후 천 화백은 딸 이씨가 거주하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천 화백의 작품은 1940~1990년대까지 작품인데, 일본 유학시절 작품부터 자화상, 다양한 인물화, 외국여행을 통해 그린 풍물화와 드로잉 등이다. 한편 천 화백은 슬하에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 씨다. 천 화백은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1924년 전남 고흥 출생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 이때부터 ‘경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함 △19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1954년 홍익대 미술대 동양화과 교수 △1961년 국전 추천 작가 △1973년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198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절필 선언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실’ 개관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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