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준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와 고가 후미타케(古賀史健 )의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가 36주째 베스트셀러 종합 1위(기준 교보문고)로 역대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은 이번 주도 큰 이변이 없는 한 왕좌를 지킬 것으로 보여 무난하게 37주째 1위에 머물 전망이다. ‘나는 소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선물하는 ‘미움받을 용기’는 3포 세대·5포 세대로 상징되는 현실과 미래가 암울한 젊은 세대를 위한 위로라는 시대의 요구에 정확하게 부응해 장기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책의 독주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은 1년 넘게,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은 3년째 종합 10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베스트셀러는 역동성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고정된 베스트셀러 순위 왜? = 교보문고에 따르면 2001년부터 올해까지 15년간 주간 베스트셀러(1년 52주) 1위를 기록한 책은 모두 152권. 매년 평균 9.3권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1위에 머문 기간은 평균 5.6주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책은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6주)과 ‘미움받을 용기’, 단 두 권뿐이다.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어느 분야든 새로운 주인공,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해 경쟁하고 치고 빠지며 활력을 만들어 간다”며 “베스트셀러의 고정화는 출판 불황을 넘어 출판의 역동성이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게감 있는 인문서는 물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2002년),‘나무’(2003년),‘연금술사’(2004년),‘다빈치 코드’(2005년),‘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년), ‘남한산성’(2007년), ‘눈먼 자들의 도시’(2008년), ‘1Q84’(2009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2010년), ‘도가니’(2011년), ‘해를 품은 달’(2012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 ‘정글만리’(2013년),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2014년) 등 매년 1위 자리에 올랐던 소설도 사라졌다.
◇열망이 사라진 시대 = 이와 함께 현재 10위권에 올라 있는 책은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2위), 동명 영화의 원작인 ‘마션’(3위), 작가 이석원의 에세이 ‘언제 들어도 좋은 말’(4위), 혼자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5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6위), 소설 ‘오베라는 남자’(7위), 김진명의 ‘글자 전쟁’(8위), 여행 칼럼니스트가 들려주는 인생을 바꾸는 여행기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9위)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10위)이다.
이들을 볼 때,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키워드 중 크게 3가지가 눈에 띈다.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있는 스크린셀러를 포함한 미디어셀러, 작가든 스타든 유명인에 대한 충성도 그리고 전망 잃은 젊은이들을 위한 책이다. 미디어셀러인 ‘마션’, 김훈에 대한 충성도를 증명한 ‘라면을 끓이며’를 제외한 나머지 책은 대부분 젊은 세대를 위한 위로 범주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경우도 주인공들이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결점투성이의 인물이지만, 이들의 진심 어린 충고가 기적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자신도 변하게 되면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도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사이토 다카시(齋藤孝) 메이지(明治)대 교수가 자신이 겪은 인생의 숱한 시행착오를 들려주며 혼자 있는 시간,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조언하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여행을 통해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삶에 대한 잔잔한 위로를 주는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미움받을 용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출판 평론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소장은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이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시대의 열망 부재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한 소장은 “사회적 어젠다를 제시하는 책들, 인문적 교양을 쌓기 위한 책들, 상상력을 자극하는 깊은 수준의 문학 작품이 없다. 여기에 재테크 책, 자기계발서 등이 사라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며 “권력에 대한 욕망, 성공에 대한 욕망마저 사라진, 퇴행적 한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