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규 / 논설위원

“실록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을 쓸 때 등장인물의 후손들 중 몇몇 사람이 내 연구실을 찾아와 선조의 비행과 오만을 축소해 줄 것을 뇌물로 청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을 걸어오기도 했던 악몽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초당(艸堂) 신봉승이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80 노인들에 의해 린치를 당한 사건”이라며 털어놓은 일화의 한 토막이다. 도대체 역사(歷史)가 뭐길래, 사극 작가에게도 테러를 가하는가.

역사의 예전 용어는 ‘사(史)’ 또는 ‘춘추(春秋)’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역사’로 바뀌었다. 그 뿌리는 영어 히스토리(history). ‘이야기’쯤 되는 이 말이 어떻게 역사로 변했는가? ‘히스토리’라는 말은 1797년 일본의 수학자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가 저서 ‘서역물어(西域物語)’에서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쯤 뒤인 1833년 식물학자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庵)은 ‘식학계원(植學啓原)’에서 ‘히시타리(斐斯多里)’라고 한자로 음역했다.

문호 개방이 한창이던 메이지 유신 때, 일본에서는 외래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활발했다. 일본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 출신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884년 ‘철학자휘(哲學字彙)’의 개정증보판을 펴내면서 많은 외래어를 한자어로 개역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역사’다. 그의 열정은 경탄할 만하다. 1600여 년 전 중국 삼국시대부터 있던 이 말을 끄집어내어 새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한 단어로 된 ‘역사’란 말은 중국의 오(吳)나라 사람 위소(韋昭·204~273)의 ‘오서(吳書)’에 처음 소개됐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오늘의 뜻과 달리 여러 가지 사서(史書)를 통칭하는 용어였지만…. 우리나라에 ‘역사’라는 말이 수입된 것은 1910년 무렵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우리 사회는 역사교과서 국정화(國定化) 논쟁이 뜨겁다. 본질은 ‘바른 역사교과서’이건만, 국정화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표는 맞다. 하지만 국정화는 ‘춘추의 필법’이 아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자 미국의 역사소설가 거스리 주니어의 말은 오늘의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고언임에 틀림없다. “뜻밖에도 역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또 뜻밖으로 역사 교육은 부실하게 이뤄지고 있다.”
황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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