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국내 경제상황에 대해 “주변 여건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더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윤 장관은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의지와 책임감을 갖고 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정치권에서도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는 행태가 근절돼야 우리 경제가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에 대해서도 “민영화를 늦춘 부작용”이라고 평가하며, “조기 민영화가 공적자금 투입 기업의 부실을 막고 세금 낭비를 줄이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특히 “국회가 경제활성화 법안을 정쟁의 볼모로 삼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대외 여건이 어느 정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전 세계 경기는 과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 세계에서 당시 충격에서 벗어나 복원력을 보이고 있는 곳은 미국뿐이다. 유럽도 재정위기를 못 벗어난 상태고, 중국은 지금까지 고속성장을 해오다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아베노믹스’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다른 주요 국가들도 경기침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수요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완벽하게 회복이 되고 있지 않아 상당기간 이런 불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으로 볼 때 기술혁신·수출 다변화 등의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이 상황을 견뎌야 한다.”
―국내 경제는 얼마나 심각한가.
“수치로 당장 제시하긴 어렵지만, 지표상으로 우리 경제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매우 좋지 않다. 내가 기재부 장관이었던 시절(2009∼2011년)보다 더 좋지 않은 것 같다. 경제는 진공 속에서 혼자 서기 어렵다. 정치·사회·문화 등 다른 모든 분야와 연계돼 있다. 특히 정치 환경이 더 나빠졌다. 정말 걱정이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도 심화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다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말한다. 지금 시대정신이 잘못 설정됐다. 평준화로 일컬어지는 평균적 개념이 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상향이 아닌 하향 평준화이기에 사회 활력도 떨어지고 있다. 잘못된 평등의 개념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비단 교육 부문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잘못된 시대정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가난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이른바 서민들이다.”
―정치 리스크를 언급했는데, 국회나 정치권을 어떻게 보는가.
“정치 분야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기업인들의 배임죄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기업인들이 사익을 위해 회사에 피해를 주는 행위에 대해 엄격히 처단하는 게 맞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법안 처리 등을 통해 국민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이걸 하지 않고 있어 배임죄에 해당한다. 기업인이 배임행위를 할 경우 회사 하나가 어려워지겠지만, 정치인들이 배임하면 10년 아니 100년 가까운 기간 국민에게 악영향을 준다. 지금 정치인은 배임 중이지만 처벌조차 안 된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 국회 거버넌스를 바꿔야 한다. 잘못된 국회 권력구조와 관습·제도를 지속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더 어려워진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국회선진화법이다. 민주주의에서 분명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지만, 다수가 소수의 승낙을 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 국회가 이 같은 상황이다. 국민으로부터 수권한 여당이 소수 반대에 휘둘리며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할 수 없게 한 제도가 국회선진화법이다.”
―뿌리 깊은 반(反)기업정서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감독위원장 시절에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단독 면담했었다. 15분 일정이었지만 45분 이상 면담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린스펀 의장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단기간으로는 후퇴도 하고 역전도 한다. 하지만 10년 이상 중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계속 발전한다. 이런 시장경제의 핵심이 뭔지 아느냐. 그건 바로 기업이다. 정부를 비롯한 레귤레이터(감독기관)들이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감독이든 검사든, 기업이 문을 닫을 정도로 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업이나 금융회사 하나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입되는가.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한다. 처벌이나 제재를 하더라도 기업에 대한 애정을 갖고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정치권이나 정부도 문제 있는 기업에 질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정을 가져야 한다. 기업이 고용을 창출하고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주체라는 걸 인정해줘야 한다.”
―지금 같은 경제 상황에서 정부가 우선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 기업 구조조정에 대입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김대중정부 초기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기업 간 ‘빅딜’을 주도했다. 위기 상황이었지만 이 같은 정부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후유증도 나타났다. 기업 간의 인수·합병(M&A)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게 바람직하다. 최근 삼성그룹이 잘한 것이 바로 자발적인 사업재편이다. 이게 우리 기업의 사업재편 롤모델이 돼야 한다. 어느 사업 분야가 더 비교우위에 있는지를 기업 스스로 더 잘 안다. 굳이 정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 조선업계를 예로 다시 설명하면,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3사들의 사업재편은 다른 기업에 모범 사례가 돼야 한다. 조선업은 이미 공급과잉이다. 이렇다 보니 과당경쟁이 엄청나다. 덤핑까지 발생하고 있어 (현재 생산 규모 등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사업재편, 체질 개선에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면 된다. 근데 이게 말처럼 잘 추진되지 않다 보니 정부가 강요하는 모양새가 된다. 그래도 정부가 직접 나서면 안 된다. 민영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우조선해양이 왜 저렇게 부실화됐는지를 봐야 한다. 조기 민영화를 해 주인을 찾아줬으면 저렇게 기업이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산업은행 등에서 4조~5조 원을 수혈한다고 나오는데 (민영화하지 않고 수혈해 봐야) 잘 안 될 것이다. 신속한 매각이 바로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과거엔 정부가 개입해 산업재편을 단행했다. 이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후 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 정부가 정말 지혜를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민간에 맡겨놓아야 하는데 사실 잘 안 된다. 과거처럼 기업들이 정부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정부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시장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업들이 신속하게 M&A나 사업재편을 성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국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이나 기업구조조정 촉진법 등을 서둘러 통과시켜 줘야 한다. 경제활성화 법안들을 정쟁의 볼모로 삼아선 안 된다.”
박수진·박정민 기자 sujininva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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