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느니 비관적 진단과 전망 일색이다. 국내외 경제기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성장률 전망치를 내리고 있다. 3% 벽이 이렇게 높아 보이기는 처음이다. 정부가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소비 이벤트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지칠 줄 모르던 성장엔진, 제조업과 수출이 동반 역주행하기 시작한 것이 특히 불길하다. 한국경제 성장공식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신호다. 국가 신용등급은 역대 최고라는데 올해 신용등급이 떨어진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최대다.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던 서비스산업은 정치성 규제에 막혀 옴짝 못하고 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노동개혁은 종적이 묘연하다. 청년들의 절망도 깊어만 간다.
난국을 돌파할 키는 역시 기업이 쥐고 있다. 한국 기업은 위기에 강하다. 적수공권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소, 철강사, 반도체 회사를 일궜다. 외환위기 때는 정보기술(IT)이라는 ‘젊은 피’가 위축된 산업계를 부축했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서는 대기업들이 신속·과감한 투자로 활로를 뚫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앞만 보고 뛰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똑같은 방식으로 추격해온 중국 기세는 반도체조차 앞날을 장담 못할 정도가 됐다. 중국과 미·일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를 돌파하려면 다른 도전이 필요하다. 요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 낡은 규제, 통념, 편견, 기득권, 과거 성공법칙 같은 겹겹의 허들을 넘어야 가능한 일이다. 희망은 있다.
로켓배송으로 유명한 온라인 상거래 기업 쿠팡이 지난 3일 내놓은 투자 스케줄은 통념을 한참 벗어났다. 2017년까지 1조5000억 원을 투입해 ‘쿠팡맨’을 포함해 3만9000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연봉 4000만 원에 6개월 지나면 정규직 대우해 주는 조건이다. 양질의 일자리다. 지난 1년간 30대 그룹이 늘린 고용은 모두 합쳐 8000명을 조금 넘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보다 몇 배 많은 일자리를 신생 벤처기업이 책임지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더구나 지난해 1215억 원 적자를 낸 기업이다. 로켓배송을 놓고는 기존 택배회사와 소송이 진행 중이다. 향후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의구심도 적잖다. 그러나 기존 잣대로 해석되는 혁신은 없다. 유통과 물류는 이미 하나다. 미국에선 드론 배송도 눈앞에 와있다. “단기적으로 생각해선 이해할 수 없는 투자다.” 김범석 쿠팡 대표의 말이다.
다음 날 현대자동차그룹은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를 론칭했다. 연산 800만 대의 세계 5위 메이커지만, 명차(名車)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지금처럼 가격 대비 좋은 차라는 평가로 몇 년을 버틸 수는 있다. 그러나 대중차의 성장 속도는 더디고 중국 토종차들이 자국 울타리를 넘어 글로벌 시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벤츠·BMW·렉서스 등 기존 강자가 두렵지만 성장성·수익성 모두 앞선 프리미엄 시장을 기피해서는 그저 그런 자동차회사가 되고 만다. 한국 주력 업종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고민이다. 진검승부는 프리미엄 시장에서 벌어지고, 그 결과에 따라 브랜드 가치가 결정된다. 현대차의 세계시장 도전사를 보면 승산도 있다.
그 다음 날 5일엔 한미약품이 믿을 수 없는 성적표를 들고 나왔다. 특허 지난 복제약이나 파는 줄 알았던 국내 제약업체가 글로벌 제약 메이저 사노피로부터 4조8000억 원을 받고 기술 수출을 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3월과 7월, 그리고 이달 9일에 올린 실적까지 합치면 계약액은 7조5000억 원을 넘는다. 국내 제약사의 지난해 매출의 절반에 육박한다. 세계 제약 시장 규모는 1000조 원대로 반도체 시장의 3배나 된다. 그러나 신약 개발·시판까지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한미약품은 개량신약, 복합신약 같은 우회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도 매출액의 20%를 연구·개발(R&D)에 쏟아넣는 뚝심도 보였다. 무모한 듯했던 투자가 속속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기업은 힘겹게 허들을 뛰어넘으려 하는데 곳곳에서 발목잡히기 일쑤다. 쿠팡의 혁신은 낡은 룰에 갇혀 있고, 제약사의 성과는 약가(藥價) 규제에 묻히고 있다. 자동차 업계의 높은 노동비용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야당은 법인세율 인상 등 기업 옥죄는 세제개편안을 다시 내놓았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도와주는 거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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