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6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헬무트 슈미트(오른쪽) 당시 서독 총리가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 후 담소하고 있다. 슈미트 총리는 대처 총리를 “19세기적 정치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AP연합뉴스
1982년 6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헬무트 슈미트(오른쪽) 당시 서독 총리가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 후 담소하고 있다. 슈미트 총리는 대처 총리를 “19세기적 정치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AP연합뉴스
냉전시대 서독 성장 이끌어
구소련·동독 관계개선 앞장
獨-佛 협력 최대업적 꼽혀


‘헬무트 슈미트는 전후 통일기까지 독일을 이끈 6명의 총리 가운데 독일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가장 훌륭한 정치가(the mantle of statesmanship)로 평가받는 리더였다.’

‘독일 통일’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유럽 통합’을 그렸던 위대한 지도자 슈미트 전 서독 총리가 10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파이낸셜타임스(FT)는 11일 ‘독일이 유럽 통합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던 정치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같이 평했다.

유럽이 사랑한 정치가 슈미트 전 총리가 10일 오후 함부르크 자택에서 숨을 거두자 전 유럽이 슬픔에 빠져들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날 TV 생중계로 발표한 추모 연설에서 “슈미트의 조언과 판단력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면서 그를 ‘하나의 정치 기관 그 자체(a political institution)’라고 추모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역시 슈미트 전 총리를 “위대한 유럽인”으로 표현하면서 “고인은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독일 국민에게 그들이 유럽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역설했던 인물이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 소속인 그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재임기간 1969~1974년)가 보좌관의 간첩행위 파동으로 물러나자 의회 표결을 통해 총리로 선출됐다. 이후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동독에서 구소련 및 동유럽으로 확대 발전시켜 장기적으로 독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8년간 서독을 이끌면서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며 유럽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전문가들은 당시 독·프 정상의 협력 틀이 유럽 통합을 이끈 초석이었다고 평가한다. FT는 슈미트 전 총리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는 동시에 프랑스 등 유럽사회와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에 대해 “그의 투 트랙 정책은 기민당(CDU) 소속의 헬무트 콜 전 총리(1990~1998년)가 자신의 후임으로서 독일 통일의 과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1918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슈미트는 십대 때 히틀러 유겐트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사민당에 입당, 1953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투신했다. 브란트 내각의 국방장관(1969~1972), 재무장관(1972~1974)을 지내다 브란트 사임 후 사민당 당수로서 1974년 5월 총선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총리로 선출됐다. 1976년 재선에 성공했다가 1982년 총선에서 헬무트 콜의 기민당에 패배하면서 물러났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슈미트를 ‘세기의 조종사(Pilot of Century)’로 평가한 바 있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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