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미국 언론은 2017년 1월 퇴임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집권 2기 최고의 순간으로 지난 6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열린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 참석을 꼽는다. 인종(人種)청소를 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한 백인 청년이 흑인 교회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 이 교회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신도 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흑백 갈등과 총기 문제가 겹쳐진 사건으로 자칫 보복 살인이나 폭동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은 추도사 도중 잠시 침묵하다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조용히 선창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찬송가에 6000여 명의 추도객 사이에 잠시 술렁임이 있었지만 장례식장은 이내 눈물과 감동의 장으로 바뀌었다. 분노와 좌절, 슬픔이 용서와 화해로 반전(反轉)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백인과 흑인, 공화당과 민주당의 증오와 갈등이 우리의 여야 관계, 지역 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미국이지만, 이런 대통령의 노래가 갈등을 눈 녹이듯이 해결하는 멋진 모습이었다.

쇼맨십도 있지만 이렇게 소통하려는 오바마의 노력 덕분에 미국 역사상 집권 2기에 자신이 내세운 ‘오바마 케어’, 이란 핵협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큰 성과를 이뤘다. 미국 전문가인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은 “유색인종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의원들과 수시로 만나고 의회를 찾아가는 오바마의 적극적인 소통 노력이 이뤄낸 성과물”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 중동의 수니파와 시아파,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 일본의 본토와 오키나와 같이 어느 나라든 화해와 통합이 힘든 갈등의 요소들을 안고 살아간다. 극단적으로 살육전으로 번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의 영호남, 좌우파 갈등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소임 중에서 이런 갈등을 잘 관리하고 화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100% 대한민국’과 대통합에 다수의 국민이 지지를 보낸 것도 사심 없이 원칙대로 잘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박 대통령 언행(言行)을 보면 내 사람 챙기기를 더 중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겨냥, ‘배신의 정치’를 일갈하더니 부친상(喪)에 조화도 보내지 않았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는 내년 총선에 나갈 장관들을 옆에 쭉 앉혀 놓고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더니 11일에는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도 했다. 배신과 은혜, 진실한 사람, 이런 말들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간 박 대통령의 행보를 돌아보면 비교적 분명하다.

사정이 이러니 박 대통령 ‘측근’에는 들지 못하더라도 찍히지는 말아야 한다는 방어기제가 여권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 TK 지역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님 정말로 사랑합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한때 박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내가 대표적 친박”이라고 주장했다. ‘진박(진짜 친박)’ ‘오박(오락가락 친박)’ ‘가박(가짜 친박)’ 등 온갖 친박 종류가 다 거론된다. 여전히 40%대 지지율을 유지하는 박 대통령 힘을 빌리지 않고는 당선이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박 대통령은 ‘혼이 비정상’ ‘배신’ ‘진실한 사람’ 등 짧고 가치 지향적인 용어를 구사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아방타방을 더 선명하게 가르는 부작용을 낳는다.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야당은 더 극렬하게 반대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올바름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단순 구도를 만들다 보니 합리적 토론이 실종됐다.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해 주지 않으면 결국 ‘거리의 정치’밖에 길이 없다. 박 대통령에게 국민화합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최근 타계한 20세기 통일 독일의 설계자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국민의 성공이 자신이나 소속 정당의 성공보다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친박 재집권’ 같은 정략을 버리고 오직 ‘친국(親國)’의 길로만 나아가길 바란다.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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