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해 모든 전쟁범죄자에게 엄중한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은 무조건 항복 요구와 함께 전범의 단죄도 명시했다.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日王)은 침략전쟁의 시작과 끝을 명령한 전범이었다. 그러나 패망 직후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이 체포를 명한 전범 중에 일왕은 없었다. 1946년 5월 3일에 열려 1948년 11월 12일 폐정된 도쿄전범재판은 애초에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로 끝날 것이 명약관화했다.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하면 백만의 군대를 재투입해야 할 것이다.” 아이젠하워에게 맥아더가 보낸 1946년 1월 25일자 기밀 전문은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미국이 일왕을 전범으로 단죄할 생각을 접었음을 말해준다. 이듬해 5월 시행된 ‘평화헌법’은 제1조에 ‘상징 천황제’를 넣는 대신 전쟁포기를 명시한 제9조를 삽입해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했다. 일왕은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고, ‘천황제’도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눈앞에 다가온 1948년 11월 미국은 일본 점령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도조 히데키 등 7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다음 날인 12월 24일 나머지 A급 전범 19명 전원을 풀어주었다.
‘역코스(reverse course)’라 불리는 점령정책의 전환과 함께 ‘무혈(無血)의 기요틴’이 되고 만 도쿄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과 너무도 달랐다. 유대인 학살과 인체실험, 거대기업의 경제적 약탈, 외국 노동자의 노예화 등 민간인에 대한 비인도적 범행을 이유로 전범을 철두철미 단죄한 독일과 달리, ‘인도(人道)에 대한 죄’로 소추된 일본 전범은 한 명도 없었다.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B·C급 전범은 처벌받았지만, 사망률이 50%를 웃돈 강제 연행 노무자나 성(性)노예였던 일본군위안부들은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긴커녕 제대로 된 배상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반공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은 침략전쟁의 주범들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독립하자 속속 정계에 복귀했다. 뼛속까지 군국주의자였던 이들은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대표적 인물이 자민당 결성 한 해 전인 1954년에 개헌을 주장한 기시 노부스케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그의 개헌 주장은 이듬해 자민당의 ‘정강’에 그대로 담겼다. 도쿄재판에서 미국은 반공의 이름으로 침략의 주범들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가해와 피해가 뒤바뀐, 전도된 역사인식이 일본에서 주류의 자리를 점하게 만든 우(愚)를 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만의 십자가가 아니다.
2005년 드레스덴 융단폭격을 ‘폭탄에 의한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라고 주장하는 신(新)나치들의 집회에 맞서 드레스덴 시민들이 촛불로 밤하늘에 새긴 ‘이 도시는 나치에 몸서리 친다’는 글은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의 양식을 비추는 거울로 다가선다. 자민당 창당 60주년(11월 15일)을 맞아 아베 총리가 만들려는 ‘전쟁 및 역사인식 검증위원회’도 청일전쟁부터 미군정까지의 역사 전반을 다시 짚어본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기실은 자민당 창당 이래의 숙원인 평화헌법 개정을 정조준하고 있다. 아베의 노림수가 미국과 일본 시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인지 여부가 못내 궁금하다. 이제 공은 집단자위권을 주장하는 아베 정부의 손을 들어준 미·일 양국 국민의 손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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