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 논설실장

누구에게나 사방이 꽉 막힌 듯 답답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광복 70년이면서, 재도약을 위한 개혁의 골든타임이라던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정치는 퇴행을 거듭하고,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 안보 환경은 구한말이 무색할 정도다. 온갖 갈등의 골은 깊어가고, 청년 실업에 노후 걱정까지 모든 세대가 불안하다.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과 ‘잘살아 보세’라는 자립 의지는 추억 속으로 밀려나면서 포퓰리즘과 의존증이 자리 잡았다.

‘해봤어’로 상징되는 ‘정주영 정신’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데 더없이 절실하다. 마침 오는 25일은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의 탄신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구성돼 23일에는 학술 심포지엄, 24일에는 기념식 등의 행사를 갖는다. 아산의 조건없는 기부로 설립된 언론인 지원 재단법인인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은 이미 9월 9일 ‘정주영과 남북관계’ 세미나를 개최했다.

‘정주영 정신’의 핵심은 창조적 발상과 불굴의 도전 정신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에 뛰어들어 단기간에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웠다. 주변에선 ‘기적’이라고 했지만 그는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추진력 때문에 저돌적이라는 말을 듣지만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열심히 생각하고 계획하는지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쌀 배달꾼 시절이나, 대기업 총수 시절이나 ‘더 하려야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을 변함없는 신조로 삼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한국 위원조차 3표뿐이라고 했던 88올림픽 유치전에서 ‘쎄울 피프티투(52표)’의 감동을 만들어낸 것을 비롯, 폐(廢)유조선으로 바다 물길을 막은 ‘정주영 공법’이나 ‘소떼 방북’ 등 수많은 아이디어도 이런 남모르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상하좌우 벽을 허문 소통과 솔선수범의 리더십이다. 항상 현장을 중시했다. 현장 작업차량이 회장인 자신의 차량보다 우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에 시찰 나갔을 때 안내하던 경찰서장이 덤프트럭을 비켜 세우려 하자 트럭 운전기사가 불응, 결국 대통령 차량이 양보한 일화도 있다. 항상 솔선수범하고, “실패하면 나의 책임이고, 성공하면 모두의 공”이라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애국심이다. 지금도 현대중공업 건물 벽에는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초대형 글귀가 있다. 자동차 수출을 시작할 때는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라며 나라를 앞세웠다. 서울올림픽 유치 및 개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정치권력의 견제를 받게 되지만 “정부, 사람, 권력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조국은 언제나 우리들의 것이며 후손들의 것”이라며 묵묵히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했다. 정치 참여도 그 연장선이었다.

복지와 언론의 중요성도 앞서 깨닫고 실천했다. 복지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77년 현대건설의 개인 주식 50%를 출연해 ‘아산사회복지재단’을 만든 민간 복지사업의 선구자였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언론에 대한 존경과 헌신도 각별했다. 1984년 관훈토론회에 참석, “추위에 떨었던 어린 시절, 가난했던 기능공 시절, 기업인이 된 오늘, 언론의 기능과 국민 교육자로서의 언론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1953년 6월부터 몇 달 동안, 기자 경험이 있던 동생 인영 씨와 ‘모던타임스’라는 당시 유일의 시사 주간지를 발행한 일도 있다. 또 다른 동생 신영 씨는 195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베를린 특파원을 지냈으며, 관훈클럽의 초기 회원이었지만 1962년 독일에서 요절했다. 아산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울었고, 평생 단 한 번의 장기 휴무를 했다”고 회상했다. 이런 인연으로 관훈클럽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신영기금으로 남아 언론 발전에 큰 기여를 해오고 있다.

이처럼 아산의 정신은 시대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난제를 극복하고 도약하기 위한 엔진이자 나침반이 됐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아산의 도전 정신을, 각 분야 지도자들은 리더십과 창의력을, 국민은 헌신과 애국심을, 상황이 힘들수록 더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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