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 세대를 독재에 항거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온 투사였다. 그는 임기 중 공과(功過)가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재임중 한때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경제 관리를 잘한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구조조정으로 스러졌고 근로자들은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맨 쓰라린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공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도 적지 않다. 특히, 그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다방면에 미친 커다란 업적 중 하나는 금융실명제 도입이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경제개발 초기에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필요한 저축자금이 너무 부족했다. 1950년대 우리의 저축은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불과했다.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국내 저축을 늘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했다. 이것이 바로 1965년 금리현실화 조치다.
그동안 저금리로 눌려 있던 금리를 시장금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올렸고, 그러고도 부족한 저축을 더욱 늘리기 위해 정부는 익명·차명·가명 거래도 허용했던 것이다. 금리현실화 조치는 상당히 효과가 있어서 국내 저축은 크게 늘었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만만찮아서 금융시장에 사채 자금 등 검은돈이 나돌고 탈세 등 부정·비리가 만연했다.
이에 따라 금융실명제 도입의 필요성은 인정됐으나 이를 시행하는 데는 정부·기업·정치권으로부터 많은 저항이 있어 지지부진했다. 이 같은 부작용과 비리가 스스로 조정되지 않고 누적되자 마침내 1982년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 지하자금을 양성화하며, 금융 거래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금융실명제 도입이 절실해졌다. 금융 거래가 익명·차명·가명도 허용됐고, 이것이 관행으로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권도 도입하려 들지 않았을 만큼 ‘금융실명제 도입’은 막막했다.
하지만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달랐다. 최초의 문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드높았고, 취임 초부터 국민과의 약속대로 ‘변화와 개혁’의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요원할 것만 같던 금융실명제도 밀어붙였다. 그는 “앞으로 이 땅의 모든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취임한 지 6개월 만인 8월 12일, 전격적으로 ‘금융실명거래,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한 것이다. 당시 실제로 실명제가 도입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또, 국회에 맡겼다간 법안 통과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긴급명령이란 특단의 조치를 동원했던 것이다. 우리 금융의 역사에는 대통령 긴급명령이 발동된 적이 몇 번 있다. 1972년 8·3 사채동결 긴급조치도 그중 하나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 “개혁 중의 개혁”이라고 했을 만큼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면 국내 자금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거나 경제가 거덜이 난다는 따위의 주장들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명제를 시행했다. 금융실명제의 정착은 그의 최대의 공적(功績)으로 꼽힌다. 지하경제를 위축시키고 정경유착 등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막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또, 탈세를 줄이고 소득격차를 줄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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