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민 / 정치부장

22일 새벽 영면에 들어간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통합’과 ‘화합’을 정치적 유언으로 남겼다. 퇴임 이후에도 한동안 YS를 취재한 기자로서 이 유언이 지역주의에 근거한 계파정치에 대한 반성이나 여전히 그 부채성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재의 정치에 던지는 메시지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소 YS 화법처럼 단순 명료한 이 유언에는 퇴임 후 YS가 겪은 인간적 좌절과 분노와 체념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YS 서거 이후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선출된 첫 ‘문민 대통령’이 그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를 선택한 국민으로서도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사태로 경제가 거덜 난 상황에서 이뤄진 YS의 퇴임은 쓸쓸하다 못해 비참했다. 취임 초 하나회 해체와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부동산 실명제와 대대적인 권력형 비리 수사로 90%대에 달했던 지지율은 10%대로 떨어졌고 ‘경제 망친 대통령’ 낙인이 찍혔다.

이런 가운데 당시 정치권에서는 YS 측에서 김대중(DJ) 대통령에게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2가지를 부탁했다는 말이 정설로 회자됐다. 하나는 ‘경제 망친 대통령’이란 평가를 수정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남 현철 씨를 사면·복권해 달라는 것이었다. YS로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것이 부당하다 생각했을 법하다. 빌려준 돈의 이자를 받은 행위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 현철 씨를 사법처리한 것 역시 여론수사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DJ로서는 YS의 요청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경제 망친 대통령’이란 규정은 대선에서 국민이 호응한 평가로 DJ가 임의로 바꿀 수 없었다. 더구나 전 정부의 책임을 강조해야 현 정부가 경제 회생의 과실을 독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기하기 아까운 카드였을 것이다. 현철 씨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소산(小山)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 농단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던 현철 씨를 사면·복권하는 것은 전 정권과의 화해라는 정치적 이득으로 덮을 수 없는 부담이었다.

하나회 해체 등을 통해 DJ의 대통령 당선에 나름 기여했다고 생각한 YS로서는 DJ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 분노했을 수 있다. 어쨌든 이후 YS는 DJ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나섰다. YS는 망명한 황장엽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김정일 정권 비판활동을 DJ가 제한한 일 등을 거론하며 ‘DJ는 독재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권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DJ에게 먹히기 어려운 주장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DJ마저 자식들의 잇단 구속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한 가운데 쓸쓸하게 임기를 마무리하면서 양김(兩金)의 번외 갈등도 의미를 잃어갔다. 이를 예감이라도 한 듯 YS는 DJ 퇴임을 2년여 앞둔 2001년 2월 자신의 서도전에서 ‘영광(榮光)’이란 글씨를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 보여주면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는 뜻에서 쓴 글”이라고 말했다. 평생 ‘대도무문’을 외치며 명분을 중시하던 YS도 가족과 세상의 시선과 같은 인간적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도 한순간이고 분노와 원망도 결국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서로 화합하고 통합하는 것이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죽음을 예감한 YS는 병상에서 붓을 들어 ‘화합’과 ‘통합’이란 글 속에 이 모든 깨달음을 녹여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노정객의 유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문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더 첨예하게 대립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를 겨냥해 “맨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고…자기 할 일은 안 하고…위선이에요”, “국회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은 직무유기고 국민에 대한 도전이다”는 등의 독설을 퍼부었다. 이에 질세라 새정치민주연합은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불도저식으로 자신의 국정운영 방식만을 밀어붙이려는 대통령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도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며 날을 세웠다. 그 공방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씰데없는 소리’라는 YS의 말이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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