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저, ‘자기 앞의 생’, 한 작가에게 두 번은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권위를 뽐내는 프랑스 공쿠르 상 1975년 수상작. 그러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저자는 프랑스 문학에서 최고로 꼽히는 그 상을 받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상을 주는 쪽에서 “공쿠르 상 아카데미는 한 후보가 아닌 한 권의 책에 투표한 것이다. 탄생과 죽음처럼 공쿠르 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수상자는 여전히 아자르다”라며 상을 떠안겼다. 그러고도 한동안 에밀 아자르는 몇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작가의 실체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떠돌았고, 이미 공쿠르 상을 수상한 적이 있던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를 표절하려는 노쇠한 작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 예순 여섯의 로맹 가리는 권총으로 스스로를 쏘아 자기 앞의 생을 마감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탈고해 두고서.
로맹 가리가 난 지 100주년이 되는 2014년, ‘내 삶의 의미’가 출간되었다. 죽음을 결심하기 몇 달 전, 라디오 캐나다 방송에서 자신의 삶과 작품, 철학과 변신에 대해 짚어보는 로맹 가리와의 대담을 담은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삶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하시는데, 난 내가 삶을 산 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군요.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았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삶을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삶인 양 기억하곤 하지요.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가 나를 이끌었고, 어떤 면에서는 나를 속여 넘겼지요.”(11쪽)
1914년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겨우 세 살이던 1917년, 사방에서 총알이 휙휙 날아들던 러시아 혁명의 붉은 광장을 기억하고, 일곱 살에는 폴란드로 이주했다가 열네 살에는 프랑스로 옮겨갔고, 삶의 한동안은 미국에서 보낸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를 겪으면서 문화를 네 번이나 갈아탄 로맹 가리는 자신이 겪은 변화에 대해 드골 장군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카멜레온을 빨간 양탄자 위에 놓으니 빨간색으로 변합니다. 녀석을 초록 양탄자 위에 놓으니 초록색으로 변하고, 노란 양탄자에 놓으니 노랗게 변하고, 파란 양탄자에 놓으니 파랗게 변했는데, 알록달록한 스코틀랜드 체크무늬 천에 올려놓으니 녀석이 미쳐버리더라는 얘기였습니다. 드골 장군은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네 경우엔 미치지 않고 프랑스 작가가 된 거로군.’”(14쪽)
카멜레온처럼 전투기 조종사를 거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는 동안 세계를 누비며 위선과 거짓, 변명거리 찾기 등 온갖 비극적인 문제를 가진 세상의 현실과 엉터리 해결책들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외교계에 발을 디딘 채 영화계와 마주친 순간을 로맹 가리는 비현실적인 동시에 현실적이었다고 돌아본다.
관찰자이자 소설가로서 삶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주변의 비현실을 이용했다는 뜻에서는 현실적이었으며, 할리우드라는 경이로운 꿈 제작소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 꿈들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었다던 그는 외교관을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명예와 사랑, 영광의 순간들을 이어갔지만 결국 자살했다.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라는 로맹 가리의 목소리는 그의 마지막을 거둬간 총성보다 크고 아프게 울린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것을, 자기 상상에서 끌어낸 최고의 것을 책 속에 담고 그 나머지, 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라면 ‘한 무더기의 보잘것없는 비밀’은 홀로 간직하지요.”(110쪽)
이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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