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맞은편 대우빌딩(현재 서울스퀘어) 뒤, 남산 서쪽 기슭인 양동(陽洞) 골목은 그 이름과 반대로 고층 빌딩 숲에 가린 수도 서울의 음지(陰地)였다. 오랫동안 집창촌이 주변에 있었고, 이곳을 경찰이 단속했다는 뉴스가 신문의 단골 메뉴였으며, ‘인간시장’의 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25일 지금은 달라진 구 양동 골목.   김선규 기자 ufokim@
서울역 맞은편 대우빌딩(현재 서울스퀘어) 뒤, 남산 서쪽 기슭인 양동(陽洞) 골목은 그 이름과 반대로 고층 빌딩 숲에 가린 수도 서울의 음지(陰地)였다. 오랫동안 집창촌이 주변에 있었고, 이곳을 경찰이 단속했다는 뉴스가 신문의 단골 메뉴였으며, ‘인간시장’의 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25일 지금은 달라진 구 양동 골목. 김선규 기자 ufokim@

(17) 소설가 김홍신의 ‘인간시장’ 무대 양동골목

장편소설 ‘인간시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나를 출세시키고 역사에 기록이 되는 영광을 선사했지만 온갖 공갈, 협박에 자식들 유괴와 가족몰살 위협 따위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나를 주면 다른 하나를 빼앗는 게 세상의 이치이고 하늘의 공평한 처사라고 위안을 했지만 본디 허약했던 아내가 그렇게 시달리다가 병줄이 깊어지고 너무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못내 가시기 어려운 아픔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사회 비판적인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은 설 땅이 없었다. 그래서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콩트를 쓰곤 했다. 3년 만에 ‘도둑놈과 도둑님’이라는 한 권의 콩트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제목 덕인지 제법 팔린다 싶었는데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칼날은 ‘도둑놈과 도둑님’을 국가원수 모독, 체제비방, 군 모독죄로 압수하고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나는 계엄사에 불려가 갖가지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붙잡아 갔던 사람은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던 실세였다. 군사계엄 시절에 군 모독죄는 중형을 받는 죄목인데 동아출판공사 임인규 회장의 주선으로, 국정원장을 지냈던 이종찬 의원과 당시 국보위(國保委·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있던 이화여대 정외과 김행자 교수의 도움으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 1981년 초부터 주간한국에 ‘스물두 살의 자서전’이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여 주인공 이름을 나도 권총 한 번 차보자는 오기로 ‘권총찬’으로 지었지만 계엄사 검열에 걸려 할 수 없이 성씨만 슬쩍 바꿔 ‘장총찬’이 되었다. 검열관도 집요했고 나도 집요했다. 검열관은 샅샅이 뒤져 지우고 바꾸었고 나는 교묘하게,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병처럼 그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리며 소설을 썼다. ‘인간시장’ 곳곳에 이가 빠진 듯한 것은 검열관들의 손장난 때문이었다. 출간할 때 제목을 ‘인간시장’으로 바꾼 것은 판매에 유리한 제목을 선택한 것이지만 어차피 또 검열을 할 게 뻔하니까 사회를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 ‘안심시키기 작전’이었다.

‘인간시장’의 판매는 2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하고 3년도 안 되어 100만 부를 돌파하여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기록되었다. 군사정권이 대학가와 노동현장, 군부대와 해외근로현장 등에 판매금지를 시켰는데도 자유를 차압 당한 국민들의 반응은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영화가 두 편이나 제작되었지만 ‘인간시장’이란 제목을 쓰지 못하게 했다. 영화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 진유영 씨가 여러 달 동안 연습하여 연극무대를 펼치던 날, 공연장소인 세종문화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경찰이 봉쇄해 버렸다. ‘인간시장’이란 이름으로는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무서운 경고였다. 항의하는 내게 사복의 기관원이 던진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더 까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삿밥 먹여준다. 당신 집을 모르겠나, 처자식을 모르겠나.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글 지랄을 하고 있어. 당신 배때기는 칼이 휘어지고 총알이 튕기는지 어디 보자….”

그럴 만도 했으리라. 쥔 자와 가진 자와 빼앗은 자들은 그들의 비열한 작태를 서슴없이 고발하는 작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가 자기들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을 텐데. 정치 거물, 재벌 총수, 종교계, 판검사, 변호사, 대형병원, 행정부 고위층, 교수 집단은 물론이요, 유명 언론사 사주까지 주먹다짐으로 해치우는 내용이었으니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었으랴.

그러나 내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서민들의 애환이었고 빼앗긴 자들의 분노의 표출이었으며 억울하게 당한 자들의 응징이었고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굳은 의지였다. 여러 해 동안 그런 현장을 뒤지고 다녔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서울요철’은 이른바 ‘뒷골목’의 적나라한 실제 상황이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서울역과 용산역, 영등포역 주변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들을 취업시켜 준다고 속여 사창가나 선술집, 미군부대 주변의 ‘양공주’로 팔아먹는 조직이 있었다. 선도반이라는 가짜 증명서를 들고 취업 알선을 한다며 이력서용 사진을 찍은 뒤에 강제로 성폭행을 하고 고향에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하여 돈벌이에 이용하는 조직이었다.

통행금지가 풀리기 직전 남루한 옷에 모자를 쓰고 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과 작은 접이칼을 넣은 채 역 주변을 배회했다. 얼마 후 두 명의 소녀를 데려가는 사내 두 명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눈치채지 않게 따라가던 나는 대우빌딩 뒤편의 양동 골목에서 공사장의 폐자재인 대못 달린 각목을 내 얼굴에 대고 눈을 부릅뜬 사내들에게 잡혔다. 위급 지경에 살 꾀가 생긴다던가, 나는 ‘가출한 여동생을 이 근처에서 봤다는 얘기를 듣고 딸 때문에 몸져누운 어머니의 간곡한 애원에 못 이겨 찾으러 왔으니 도와주면 보답하겠다’고 둘러댔다. 이것저것 캐묻고 집 주소까지 확인하더니 그중 건장한 사내가 나를 데리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흥정을 하고 이튿날 낮에 다시 그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나는 밤새도록 고민했다. 착수금을 주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가출하지 않은 여동생은 어쩔 것이며 만약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라는 걸 들키면 무슨 꼴을 당할지 걱정이었다. 결국 다음 날 나는 그 다방으로 들어섰다. 솔직하게 말하겠다며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이니 도와주면 사례를 하겠다고 털어놓았다. 사내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웃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고심하던 두목인 듯한 사내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 자식, 이거 모가지가 두 개인가. 인마, 나랑 동업이라도 하자는 거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도가 달라지더니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서울역이 아닌 용산이나 영등포역으로 지명을 바꿔주면 소녀들을 팔아먹는 방법을 죄다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약속을 했다. 물론 소설을 쓸 때는 서울역으로 표기해버렸다. 그들 덕에 나는 연달아 청량리 588과 일본으로 팔려간 여성들을 추적하고 소설을 담금질할 수가 있었다.

그 시절엔 취업할 곳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막노동판도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 곳곳에 인력시장이 생기곤 했다. 꼭두새벽의 신촌 로터리에는 40, 50대의 중년 남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거개가 공사장의 막일꾼으로 팔려가는 곳이었다. 일꾼을 데려가는 사람들과 갖가지 흥정이 이루어지지만 더러는 언성을 높이고 멱살잡이도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는 절박한 가장들의 행렬에 궁핍이 절로 묻어났다. 작업복 차림으로 두어 시간을 서성였지만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일꾼 구하러 온 사람들은 내 아담한 체구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백 명쯤 되는 막벌이꾼들은 선택되어 실려가는 사람들을 부러운 듯 쳐다볼 뿐 옆 사람과 말도 하지 않았다.

남산 쪽에서 바라본 양동 골목이 대우빌딩 뒤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남산 쪽에서 바라본 양동 골목이 대우빌딩 뒤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햇살이 밝아지면 축 처진 뒷모습을 보이며 흩어져 사라지던 그들의 땀방울이 대한민국을 키운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생존을 위해 지옥으로라도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힘이 아니었으면 어찌 우리의 오늘이 있었으랴. 목숨 건 월남 파병과 독일의 인력수출과 중동의 열악한 근로현장도 모두 절박함으로 달려간 그들의 힘이 아니었던가.

그 시절엔 소매치기와 가짜 점쟁이와 사이비 종교인과 골목건달들이 꽤나 많았다. 소매치기 기술을 어려서 배웠다는 중년 사내의 손재주는 도박 조직원의 손놀림만큼이나 재빨랐다. 소매치기와 도박꾼의 공통점은 손기술만큼이나 능력 있는 바람잡이가 필요했다. 그 바닥에서 손기술을 익히면 먹고사는 게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쪼들렸다. 그들의 뒤를 봐주는 건달들이 결코 넉넉하게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살림이 넉넉해지면 긴장이 풀려서 실수하게 되고 감옥살이 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그 바닥도 약육강식의 동물세계 같은 세상이었다.

1980년 초에는 가짜 휘발유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지인이 소설거리가 있다며 서울 변두리의 폐계사를 개조한 건물에서 진짜 휘발유보다 자동차가 더 잘 달리게 하는 가짜 휘발유를 만드는 패거리가 있다고 했다. 두어 달 동안 수소문을 해서 밤길에 찾아갔더니 그들은 공기총을 개조한 사제총을 들고 있었다. 유조차가 드나들어 생긴 자동차 바큇자국이 파인 것으로 보아 생산량이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걸친 사내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그는 수십 개의 드럼통 너머의 작은 방에서 연신 담배를 피웠다. 가짜 휘발유 만드는 법을 말할 수 있지만 섞는 비율과 휘발유 색깔 내는 방법은 비밀이라고 했다. 또 가짜 휘발유 원료인 화학물질 구입 방법과 판매 루트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제조책이 가짜 휘발유를 만들면 운반책과 판매책이 유조차에 싣고 판매장소 2∼3㎞ 전에 유조차 뚜껑을 열어 일본제 색소를 넣으면 차가 달리는 동안 차체가 흔들려 휘발유 색깔로 변한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가짜 휘발유를 거래할 때 귀신처럼 나타나는 ‘밀정’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전직 기관원이나 경찰 출신들인데, 뭉칫돈을 쥐어 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고 했다. 진짜 전직이냐고 물었더니 현직도 있을 거라고 했다. 더 기가 찰 일은 그런 밀정의 뒤를 밟아 반타작을 하는 ‘밀정애비’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세무공무원이 담뱃갑이나 껌갑에 돈을 감추어 거래하다가 전직 공무원에게 들켜 반타작을 하는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세상은 날고, 뛰고, 채뜨리고, 후려치는 선수들의 놀이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밑바닥이 이런 정도라면 다른 계층의 비리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의문이었다.

법과 상식과 윤리와 도덕과 바른 소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주먹으로 해결하는 악동 같은 장총찬 때문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빼앗은 자들은 가진 자들만 등쳐먹는 게 아니라 서민들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가는 세상이었다. 그들을 징치하지 않고는 세상이 밝아질 수 없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아니라는 생각에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이 산지사방에 출몰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나 더욱더 교묘하고 비열하게 선량한 국민들을 등쳐먹는 무리들이 날뛰고 있다. 언젠가는 ‘신 인간시장’을 쓸 생각이다. 살맛 나는 세상을 위하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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