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짧게 깎고 서양식 군복을 입은 고종. 1907년 일본인 사진작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서양식 군복을 입은 고종. 1907년 일본인 사진작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와 권력 / 권행가 지음 / 돌베개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역사의 패자가 됐을 때 그들의 이미지는 또 어떻게 왜곡됐을까.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이미지 조작’이 근대에는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는지 고종의 남겨진 사진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다.

왕의 초상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을 발탁해 ‘어진(御眞)’이란 이름으로 그려졌으나 진전에 봉안된 채 각종 의례 등을 통해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할 뿐 일반에 노출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전통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서양인의 카메라 앞에 최초로 선 이가 고종이었다. 고종은 1884년 서양인 퍼시벌 로웰의 카메라 앞에 서며 외국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재현토록 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고종은 복장은 물론 어좌와 오봉병의 배치까지 신경을 씀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거나 그리는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왕으로서 자신이 갖는 다양한 위엄과 상징의 의미를 전달하려 애썼다는 점이다. 1894년 청일전쟁 무렵부터 그의 초상은 서구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포됐고 새비지 랜도어, 휴벗 보스 등에 의해 그림이나 삽화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엽서나 기념품으로도 제작됐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 유포되기 시작한 고종의 이미지는 고종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고종이 취한 ‘정면상의 포즈’는 이미 서구에서는 비문명의 상징이었으며 그들의 눈에 고종은 조선의 왕이기 이전에 조선인의 표준형에 불과했다.

반면 사진 촬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일본 천황은 서구의 황실 초상화들처럼 4분의 3면상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또 서양인 화가의 몸에 메이지(明治) 천황의 얼굴을 합성해 ‘서양인의 신체를 가진 천황’으로 문명화된 일본의 표상이 될 수 있게 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이미지 속 고종의 위상은 추락한다. 목판화 등의 매체를 통해 조선의 왕은 무능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왕비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악녀)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저자는 “고종과 순종뿐 아니라 황실 이미지의 생산과 유포의 주도권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며 “고종의 초상 만들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국내의 이미지 활용 역사에서 고종의 초상은 그 기원의 자리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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