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불감증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눈 지그문트 바우만(왼쪽)과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캐리커처. 책 읽는 수요일 제공
도덕적 불감증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눈 지그문트 바우만(왼쪽)과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캐리커처. 책 읽는 수요일 제공

도덕적 불감증 /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 읽는 수요일

올해 아흔한 살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태생 영국 사회학자의 이름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어둠 속에서 쳐다보는 정신의 등불이자 갈림길에 설 때마다 길을 묻는 지혜의 상징이 되었다. 일찍이 그는 “자신들의 삶이 펼쳐지는 동시대의 의미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책무로 삼았고, 또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리고 이 책무와 포부를 동시에 달성한 흔치 않은 사상가가 되었다. ‘도덕적 불감증’은 ‘악’에 대한 책이다. 오늘날 악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악함을 물리치고 성스러움을 되찾고 싶어도, 도대체 무엇을, 어디에서 물리쳐야 할지 모른다. 성배를 찾아 떠난 아서 왕처럼, 지도를 그리면서 수시로 닥쳐오는 악당의 하수인마저 물리쳐야 하는 형국이다.

여행은 홀로 떠날 수 있지만, 모험은 절대로 홀로 갈 수 없다. 성배를 찾으러 가는 것 같은 모험, 즉 길은 험하고 위태로운데 보물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모험에는 친구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바우만은 가끔 친구를 초대하는데, ‘도덕적 불감증’에서 동반한 사람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랑 학자’ 레오니다스 돈스키스다. 아서 왕이 랜슬럿을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은 우정과 경쟁의 향연을 펼치면서 편지를 주고받고 우리 시대 악의 지도를 그려 나간다.

사실, 내비게이션에 길 찾기를 의존하면서, 우리는 모두 ‘길치’가 되어 버렸다. 익명의 목소리를 따라 부지런히 운전대를 돌릴 뿐이다. 이제 여행은 자유가 아니라 노예 행위로 전락했다. 바람이 불고 물이 울고 새들이 지저귀고 사람들이 건네는 소리를 무시한 채, 주인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로봇처럼 여행자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점프시킨다. 내비게이션은 이동을 손쉽게 하는 게 아니라 이동을 식민화한다. 여행자를 이동에 무감각하도록 만든다. 지형을 더듬고 확인하면서 공간을 상상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박탈한다. 그래서 오늘날 ‘지도 그리기’는 여행의 흔한 일상이 아니라 대단한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두려운 모험이 돼버렸다.

자유가 자발적 예속이 되는 낯선 이 세상이 바우만이 통찰하는 오늘의 세계다. 과거에는 예속이 쇠사슬의 형식으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부자유는 자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장소를 찾으려고 내비게이션을 켜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노예가 된다. 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가령 아동노동이 벌어지는 악의 현장을 청소하는 대신, 이른바 ‘공정무역’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악을 다른 식으로 연장한다. 한 상품의 소비자가 됨으로써 시장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에 동의해 버리는 것이다. ‘작은 선행’을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소비’는 도저히 악을 정의할 수도 물리칠 수도 없다. 소비 자체가 악의 실현이며, 시장 자체가 악의 본질인 까닭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악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보통 시민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국가의 지도자들이 모여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머리를 싸맨 후,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주가를 초조하게 기다려 제안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행위를 보라.

이 같은 ‘정치의 시장화’나 ‘윤리의 민영화’야말로 전 세계에 만연한 악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는 상품에, 또는 상품화된 체제에 정치적, 윤리적 주체성을 의탁함으로써 타인의 진짜 고통에는 무감각해진다. 바우만과 돈스키스는 이 상태를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부른다. “인간의 특정한 행위나 범주를 도덕적 의무와 평가의 영역 바깥에 놓는 것”으로, 도덕적 마비상태를 말한다. 아디아포라에 포획된 주체들은 ‘땅콩 회항’ 같은 우연하고 과격한 일회성 사건에는 쉽게 분노한다. 이럴 때 페이스북은 ‘좋아요’와 ‘공유하기’의 격분이 물결치고, 광장은 몰려나온 이들로 터져나간다. 그러나 불평등과 부정의가 차츰차츰 확산되면서 인간적 가치가 서서히 평가절하되고 공포와 모멸이 일상화된 영역에서는 식별력이 무뎌지거나 시들해진다. 간장종지 사건에서처럼 ‘무감각하게도’ 갑자기 가해자로 돌변할 정도로 악의 일부로 살아간다.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 불쌍한 현대인 전체를 ‘아이히만’으로 선포한다. 악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선량한 아버지이자 잔혹한 집행인인 존재로 스스로를 ‘아프게 감각하자’고 호소한다. 우리 삶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사랑을 회복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시장의 온갖 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타자를 존중할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을 존중할 수도 없다. 타인의 고통에 눈 감는 것은 ‘자기모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 ‘같은’ 존재인 다른 사람은 나만큼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없고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자다!”

악이 지배하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른다. 지옥에서는 모든 인간이 쓰레기가 된다. 경멸과 조롱이 일상화된다. 대안적 삶을 고민하는 정치는 증발하고, 자극적 볼거리가 일상화된 정치쇼로 대체된다. 하지만 ‘체제 자체’에 있다. 사람 대신 상품을 중심에 둔 체제 자체를 성찰하지 않는 한 아무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것이 ‘도덕적 불감증’이 독자들에게 촉발하려는 정치적, 사회적 기획이다.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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