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지난 2000년 7월 김대중정부 시절 연정파트너인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17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에 여당은 20석인 원내교섭단체 요건을 15석으로 하향 조정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하려 했지만 야당 반대로 애를 먹었다. 결국 직권상정과 ‘강행 처리’를 도모했다. 이만섭 국회의장이 이에 반대하자 사회권을 자민련 총재 대행인 김종호 국회 부의장에게 넘겨 처리한다는 ‘플랜2’도 마련했다.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과 보좌관 100여 명은 김 부의장의 서교동 집을 철통 봉쇄했다. ‘꾀돌이’로 알려진 김 부의장은 의원들에게 “나를 지키느라 수고가 많다”며 중국집에서 자장면 200그릇과 탕수육, 중국 술을 시켜 의원들과 보좌관들에게 먹이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평상복 차림으로 담을 넘어 탈출했다. 그러나 인근 복덕방에 신발도 신지 않고 은신해 있다가 야당 저지조에 발각돼 다시 자택에서 ‘연금’되는 수모를 당했다.

여야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정부 시절이던 1995년 3월에는 당시 야당 의원들이 황낙주 국회의장의 공관을 점령, 7일 동안 봉쇄했지만 결국 경찰에 끌려 나왔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모래시계’ 드라마 비디오를 구해 황 의장과 함께 시청하면서 꼼짝 못하게 감시하곤 했다. 전기톱, 해머까지 등장하고 비밀통로를 이용한 새벽 기습처리까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권이 펄펄 살아 있을 때 국회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일들이다.

국회 선진화법 이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이 ‘천재지변·국가 비상사태·여야의 합의’ 등으로만 한정돼 이젠 이런 장면들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지만, 그 관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15일 정의화 국회의장을 방문해 노동개혁법안 등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 의장이 이를 직권상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쟁점법안 처리가 비상사태는 아니라는 것을 청와대도 알지만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무리한 주장을 펼친 것 같다. 소수당이 반대하는 법안을 다수당이 통과시키는 최후의 방법으로 제9대 국회 때부터 명문화된 직권상정 제도는 결국 ‘날치기·동물국회’를 만든 원인이 돼 버렸다. 선진국 의회에서 직권상정 권한을 부여한 입법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타협의 문화를 배우지 못한 국회는 무능·무책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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