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세반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스티븐 린튼(65) 유진벨재단 회장은 아마도 북한이 가장 신뢰하는 미국인일 것이다. 1991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북측 인사들과 접촉하면서부터 시작된 인연은 1990년대 중반 자연재해 때 대북지원사업으로 연결됐고 이내 북한 보건의료지원활동으로 발전됐다.
이후 그는 결핵 퇴치를 위해 북한 곳곳을 방문하며 결핵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을 접촉해 북한의 속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올해로 20년을 맞은 유진벨재단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듣기 위해 지난 4일 경기 안양의 유진벨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7년 전 만났을 때엔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서 인터뷰했는데 이번엔 순우리말로 했다. 그의 우리말 실력은 완벽했다. 악센트도 필요에 따라 순천 억양을 쓰다가 평양식 말투로 바꾸는 식으로 전환했다. 그의 테이블 옆에는 두꺼운 조선어사전이 3권 놓여 있었다. 북한의 일반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 정도로 열심히 북한식 표현을 익히고 있는 듯했다.
―유진벨재단이 올해 20년을 맞았는데.
“20년 전부터 북한 지원활동을 해왔다. 구체적으로 1997년부터 북한 전역에 걸쳐 일반결핵 치료를 해왔다. 4가지 약을 키트로 만들어 사용했다. 2000년부터는 세계보건기구(WHO)와 역할을 분담해 우리가 평안남북도 25만 명을 담당했고 나머지 지역의 환자는 WHO가 맡았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WHO 글로벌 펀드가 북한의 일반결핵을 다 맡고 유진벨재단은 WHO가 치료하지 못하는 다제내성결핵, 말하자면 슈퍼결핵 환자에 집중하고 있다.”
―결핵 치료를 WHO와 역할 분담한 셈인데.
“결핵 치료는 레일이 2개 있어야 한다. 하나는 일반결핵 치료, 다른 하나는 일반결핵 치료에 실패한 환자들을 위한 항암치료 수준의 치료다. 박테리아가 완전히 다르다. 약을 제대로 못 먹고 키우는 병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지금은 슈퍼결핵이 적다. 과거 냉전시대 구소련은 일반결핵 대 슈퍼결핵이 3대 1이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슈퍼결핵 환자였다. 그런데 한쪽으로만 치중하면 몰리게 된다. 북한이라는 방안에 모기가 100마리 있다고 치자. 95마리는 일반결핵모기, 5개는 슈퍼결핵모기라고 할 때 일반모기만 죽이는 모기약에 집중하면 일반결핵모기는 죽으니 성공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슈퍼결핵모기가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결핵 치료는 일반결핵 치료와 슈퍼결핵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WHO는 북한에서 일반결핵 치료만 한다. WHO 지침서에는 필연적으로 슈퍼결핵 치료를 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는데 왜 그런지 북한에서는 일반결핵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다제내성결핵 환자를 북한 당국도, WHO도 치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은 한국인들이 슈퍼결핵에 노출될 것이다. 개성공단이 일차적으로 문제다. 지금 개성공단 근로자들에 대해 다제내성 감염 여부를 스크린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 밀폐된 공간에서 수백 명이 일하고 있는데 상당히 우려스럽다. 경기도가 우리 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제내성결핵 치료를 항암 치료 수준으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다제내성결핵약은 6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를 먹으면 메슥거리고, 두 번째 먹으면 귀가 먹먹해 잘 안 들린다. 부작용이 아주 크다. 그래서 포기하고 약을 안 먹는 환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약을 제일 거부하는 이들은 새터민이다. 왜냐하면 6개월만 먹으면 모기들이 죽어 많이 회복된다. 숨은 모기들까지 잡으려면 오래 먹어야 하는데 조금 괜찮아지면 끊는다. 모기 수만 떨어뜨린 뒤 약을 중단한다. 1년 반 이상 먹어야 하는데 거의 100% 중단한다. 그러니 재발률이 높다. 치료비도 엄청나다. 우리가 북한에서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비용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에서는 10배, 미국에서는 100배가 든다. 우리가 북한에서 투입하는 비용은 환자 1인당 500만 원인데 한국은 5000만 원, 미국은 5억 원이 드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외래치료하면서 매일 가서 약을 먹이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한국은 외래치료하면서 환자들을 쫓아가지 않아 중단율이 30%나 된다. 유진벨재단은 북한에서 입원치료를 강조하기 때문에 중단율은 2∼3% 수준이다.”
―유진벨재단 일이 과거에 비해 많이 체계화된 것 같다.
“이제는 북한 사람들도 우리 재단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문제는 다제내성 환자 규모가 매년 너무 늘어난다는 것이다. WHO는 1년 기준으로 북한에 일반결핵환자 10만 명분을 제공한다. 일반결핵환자의 경우 1인당 치료 약이 연간 2만 원 안팎이다. 거기서 4∼5%가 실패해 슈퍼결핵환자가 된다. 북한의 경우 1년에 4000∼5000명이다. 슈퍼결핵환자 치료비는 환자 1명당 18개월에 500만 원 정도 든다. 재단이 열심히 모금해 연간 1500명 정도 치료한다.”
―북한에서 매해 4000∼5000명의 슈퍼결핵환자가 나오는데 그 정도밖에 치료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상황 아닌가.
“그렇다. WHO가 북한에 매년 일반결핵환자용 10만 명분, 다제내성환자용 200∼300명분의 약을 제공한다. 4000여 명의 환자가 약도 못 받는다. 우리가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하는데 방법이 없다. 공공부문에서 약을 받을 수 없으니 북한 사람들이 장마당 등에서 질 나쁜 불법 복제약을 사 먹는 등 유혹을 받는다. 다제내성결핵을 고치려면 6가지 약을 동시에 표준처방으로 18개월간 꾸준히 먹어야 하는데 먹다 말다 하면 실패한다. 섣불리 먹으면 약에 대한 내성만 키우게 돼 우리 사업에 등록하더라도 치료가 안 된다. 그러니 시간이 시한폭탄이다. 매해 신규 발생하는 환자들을 다 치료해야만 다제내성 증가율을 막을 수 있는데 치료를 못해 환자가 급증하는 상황이다. 환자는 죽기 전에 가족에게 옮기거나 장마당에 가서 더 무서운 병을 만들어 옮기고 죽는다. 결핵으로 죽을 경우 우리는 결핵균에 사람이 익사한다는 표현을 쓴다. 균이 폐의 혈관을 갉아먹어 폐에 피가 넘치면서 익사하는 꼴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런 점에서 1년 반의 약은 결핵균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는 구명조끼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내성결핵 환자치료사업이 시작된 이후 7년간 우리는 북한 실정에 맞는 치료법을 연구해 왔다. 이에 따라 다제내성결핵환자 치료를 위해 북한에 적합한 특별병동을 만들기로 했다. 이제 치료의 로드맵은 마련한 것이다.”
―다제내성환자 치료 특별병동을 어떻게 생각해냈나.
“북한에 적합한 방식이 무엇인지 궁리했다. 북한에서는 음식을 집안에서 만들고 대개 한방에서 지내니 대부분 가족이 전염된다. 이를 막기 위해선 음압방이 필요하다. 북한에 전기가 없으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문이 밖으로 나오는 한옥 같은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스타일로 큰 요양소를 짓고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층건물, 현대적 건물이 아니라 한옥 같은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면 일정 기간 모든 환자가 현대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그러려면 단열이 잘 되는 집을 지어야 한다. 땔감도, 전기도 부족한 추운 날씨의 북한에서는 결핵 퇴치를 위해 이런 시설이 필요하다. 패널 하우스는 미국에서 나오는데 하루에 1개 조립이 가능하다. 결핵요양촌이 필요한데 도마다 이런 시설이 있어야 한다.”
―설계작업을 시작한 상태인가.
“벌써 건립작업을 시작했다. 북한 실정에 맞게 도마다 설치해 결핵 퇴치에 실패한 환자를 모아 과학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대량으로 건축자재를 보내려 한다. 한국 회사도 한 곳 참여하고 있다. 집안에 들어가면 주방, 그리고 바로 방.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작은 땔감으로도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할 정도로 따뜻하다. 미국의 일반 집보다 10배 정도 단열된다. 미국의 좋은 집보다 좋은 건축자재가 쓰이는데 한 병동을 건립하는 데 2500만 원이 든다. 거기서 4∼6명이 치료받을 수 있다. 초기 비용은 비싸지만 이 시설을 30∼40년간 활용한다면 치료값에 큰 부담이 안 된다고 본다.”
―북한 조건에 맞는 개량형 병동까지 설계했다니 대단하다.
“순안에 이런 요양소를 건립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20년 북한에 다니면서 결핵 치료를 해왔는데 이제 전환기에 온 것 같다. ‘구명조끼’ 설계가 됐고, 북한 당국도 적극적인 자세다. 북한에 제공되는 약은 모두 한국 약이다. 그중 1개만 인도에서 구매하는데 한국 것이 10배나 비싸기 때문이다. 약과 치료방법, 치료시설까지는 북한에서 승인하고 추가 건립 시 토지 제공 등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제는 환자를 늘릴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한국 사회가 여기에 얼마나 투자를 할까이다. 아프리카나 인도, 남미 등 슈퍼결핵환자가 약을 받고 싶으면 다 방법이 있다. 슈퍼결핵 때문에 약이 없어 죽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북한인들이다. 그런데 한국은 힘 안 들이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다면 남북통합에도 좋은 것인데 할까 말까 하는 그런 상황이다. 지금 우리에겐 그 질문밖에 안 남았다.”
―한국이 전면적으로 관여하려면 북한도 빗장을 열어야 하는데.
“일단 우리 유진벨재단과 같은 창구, 우리와 같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서 하면 된다. 민간 차원에서도 할 수 있고 정부 의지가 없어도 할 수 있다. 정부는 반출 승인만 하면 된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당분간 일을 하자는 것인가.
“그렇다. 그런데 한국의 대부분 인사들은 북한 문제에 맞닥뜨리면 정부만 쳐다보며 정부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민간이 할 수 있다. 재단을 설립해 약을 구매하고 북한에 보내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제내성결핵 지원사업을 하면서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과거 일반결핵환자 지원을 할 때엔 통일기금 지원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런데 과연 한국 국민이 이런 일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가가 문제다. 유진벨재단을 후원하는 분들은 별로 돈도 없는데 환자를 ‘입양’(그는 환자를 1대 1로 연결해 지원하는 사업을 입양이라고 표현했다)해 지원한다.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기도하고, 지원환자가 사망하면 함께 슬퍼한다. 생사를 함께하는 일종의 가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해도 최대 1500명을 치료할 뿐이다. 나머지 수천여 환자는 약을 타기 위해 순번표를 받고 기다리고 있다. 하루빨리 1년에 2000명, 3000명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의 경제력이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인데.
“그렇다. 지난 20년간 북한을 오가며 결핵 치료활동을 진행하면서 구조적인 문제는 다 해결했다. 약품 분배의 투명성, 치료의 효율성, 치료 시설 관리, 환자 치료 확인법 등을 객관적으로 마련했다.”
―시행착오는 없었는지.
“물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북한 결핵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약품들이 가야 할 루트와 방식을 다 마련했다. 6개월마다 우리가 방문하면 트럭 5대가 동원돼 각지로 약품과 영양가루(환자들이 매일 약과 함께 먹는 단백질, 현미 가루) 등을 전달한다. 그 약품들을 트럭으로 보낼지, 택시로 보낼지, 자전거로 보낼지의 문제는 이제 한국인들이 결정할 문제다.”
―북한 환자들은 한국의 지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 약과 영양가루 등을 보내준다는 것을 다 안다. 환자 개개인이 받는 약 상자에는 지원자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뿐 아니라 환자들을 교육하는 자료도 한국에서 인쇄해서 북한에 분배된다.”
―오랜 인내의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물론이다. 한국인들은 뭐든 단칼에 해결하려고 한다. 30초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7년이 걸렸다.”
―재단 설립 기준으로는 20년이다.
“그렇다. 20년. 그런데 어찌 보면 1979년 평양세계탁구선수권 대회때부터 방북했으니 30년 걸렸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더 답답하다. 비용만 있으면 좀 더 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하다.”
―대북의료자선재단으로서 미국식 모금운동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미국식으로 못한다. 우리는 충격적인 사진 등을 게재하면서 모금을 못한다. 유니세프 등은 충격적인 사진을 공개하며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한다. 남북한이 같은 민족인 만큼 합리적으로 판단해 지원운동을 해나가도록 하는 것을 우리는 지향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일선에서 뛸 계획인지.
“올해 65세다.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모금사업보다도 사업 전략 및 집행에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도 내 시간의 85%는 모금활동에 투입된다. 20여 년째 여전히 나는 구명조끼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인 셈인데, 앞으로 구상 쪽에 좀 더 시간을 투입하고 싶다.”
―지나온 20년을 평가한다면.
“없던 길을 만드는 일은 이제 끝났고, 만들어진 길을 따라 집행하는 일밖에 안 남았다. 요즘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 유진벨재단은 실패했다. 이 일은 한국인들이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은 이 일을 인세반이 하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5∼6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그간 유진벨재단이 치료해 왔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규모 다제내성결핵환자가 늘어날 것이다.”
―북한 다제내성환자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위급성을 한국인들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실패했다. 아직 역학적 차원에서는 북한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매해 다제내성에 빠져 죽는 사람이 늘고, 구명조끼를 입으려는 이들도 느는데 우리 재단에는 구명조끼가 부족하다. 환자들을 번호표를 주고, 6개월 뒤에 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세계에서 이런 데가 없다. 세계에서 이렇게 잘사는 나라(한국) 옆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비극이다. 물론 북한을 비판하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한 분야에서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전례가 없다.”
―유진벨재단이 유일한 것 같은데, 유진벨 가문의 한국 사역 전통 때문일까.
“그건 유진벨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핵이라는 분야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결핵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말인가?
“우리는 어떤 계약도 없이 1년 6개월간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6개월 약밖에 안 준다. 그런데 어떻게 하든 간에 6개월 뒤에는 또 간다. 그들도 우리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유진벨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신뢰다. 유진벨재단은 정확히 말해 남북한 간 민간 교류 통로다. 비록 대표는 외국 근로자이지만 본질은 본인들이 하기 힘든 것을 외국인을 고용해서 정치를 초월해 가래약을 교환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대표를 영웅처럼 띄우는데 그건 완전히 우리 일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 사업을 일선에서 조직하는 사람, 기금을 내는 사람 모두 한국인이다. 그렇게 하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들도 북한과 남한 정부 인사들이고, 결핵약을 만들어준 사람도 한국사람들이다.”
―결핵에 집중된 유진벨재단 사업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계획이 있는가.
“북한에서는 보건의 첫째도 결핵이고 둘째도 결핵이며 셋째도 결핵이다. 아픈 사람들의 첫째 원인도 결핵이고 둘째 원인도 결핵이며 셋째 원인도 결핵이다. 그래서 결핵에 집중하는 게 문제를 푸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성이나 아이들, 장애인 지원기관에 대해선 일반인들이 줄 서서 기부하는데 결핵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자선사업에는 불공평이 있다.”
―보여지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자극하는데 결핵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인데.
“맹자도 말씀하시길 악인도 아이가 물에 빠지면 동정을 한다고 했는데 결핵의 경우 삐쩍 마른 사람들이고 대부분 20, 30대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리 큰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깊은 뜻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제대로 이들에게 집중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도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앓다가 죽는 사람들 정도로 인식된다.”
―의료부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인문학자가 이제 의료전문가가 다 된 듯하다.
“결핵 치료시스템을 설계하는 데에는 의료적 지식도 필요하지만 정부나 사회 다른 부문과 협력하며 계획할 부분이 많다. 하나하나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러 오솔길을 걸은 끝에 언덕을 넘어온 듯한 느낌이다.”
―유진벨재단은 정직한 길을 선택한 것인데.
“정직한 길이 오래간다.”
―최근 들어 개별 신문사에서 통일기금을 모으는 등 통일 준비 관련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자꾸 통일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은 남북한이 하는 것인데, 남측 혼자서 통일을 얘기하며 준비하고 있다. 결혼을 하려면 신부가 있어야 하고 장례식을 하려면 시신이 필요한데 결혼식이나 장례식 준비를 혼자 하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통일대박을 위한 움직임을 상호 간에 하려 하기보다 혼자서 하는 통일 준비가 대박인 상황인 것이다. 덧붙여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모든 것을 정치로 해결하려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안타깝다.”
―은퇴하면 북한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개개인이 그런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런 것은 본인의 꿈일 뿐이다. 결혼을 하려면 신부가 필요하다. 대북지원활동에 대한 꿈도 마찬가지다. 내가 북한에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식으로 꿈을 꾸기 전에 지금 북한에 어떤 것이 필요하고 북한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꿈, 북한 현실에 맞는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대북활동에서 얻은 지혜를 책에 담아도 좋을 듯한데.
“짐 나르는 택배회사에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
―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한국 정부에 호소한다. 기다리지 마라, 더 저렴하게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유진벨재단의 치료 성공률은 75%인데 한국은 48%다. 그러면 치료 성적도 좋고 값도 10분의 1이고, 전염되기 전이라면 지금이 중요한 시간이다. 북한의 다제내성결핵환자들을 유진벨재단과 함께 치료하자. 북한의 결핵 치료에 집중하면서 진실된 통일을 준비하자. 결핵 퇴치 차원에서부터 통일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통일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다제내성결핵 퇴치사업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폐부를 찔렀다. 우문에 현답을 쏟아내는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1시간 30분이 흘러 얘기를 정리하고 일어서려 했더니 그가 마무리 말을 했다.
“저만 띄우지 마십시오. 한국인들이 세계에 나가 한국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다니려면 북한의 다제내성결핵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엄청 비난을 받을 겁니다. 후손에게도 세계에서도. 지금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유진벨재단이 아니라도 한국인들이 정부가 아니라도 민간이라도 큰 힘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 때 빨리 나서야 합니다.”
인터뷰 = 이미숙 국제부장 muse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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